방황의 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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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꽤 오래된 이야기인데 1994년엔가 대전에 있는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가 있었다.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려고 버스터미널에서 기다리는데 거기서 대학 동창을 만나게 되었다. 서울 어느 대학의 교수였는데 대전에서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2년 만에 만난 것인데 그는 단번에 이런 질문을 했다. “그때의 방황은 이제 끝난 것인가?” 질문을 듣고서 나는 새삼스럽게 젊은 시절의 방황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고등학교까지 제주도에서 다녔는데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아마 그때부터 나는 기나긴 방황을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왜 그렇게 방황을 해야 했는지? 중요한 한가지 이유는 전공 분야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자연과학 쪽의 대학에 입학했는데, 10여 년 후에 나는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전공 분야가 정반대로 바뀐 셈인데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4·3사건의 시기에 제주도에서 청년 시절을 지내셨다. 격렬했던 시기를 지나면서, 경찰관으로 일하셨고 ‘제주신문’에서 글을 쓰셨고 정치적인 일에도 관여하셨다. 그런 일들이 너무 힘들어 그랬는지 아버지께서는 일찍 심장병에 걸리셨다. 지금 같으면 심장이식도 하는데 그때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다가 40세에 돌아가시면서 이런 유언을 남기셨다. “큰아들은 글 쓰는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는 가까이 가게 하지 마라!” 그 유언대로 나는 글 쓰는 일이나 정치가 아닌 자연과학 쪽의 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나의 가족은 모두 인문 사회 계통인데 오직 나만 자연과학을 하게 되었다. 적성이 안 맞아서 그랬는지 공부에 흥미를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돌이키려 했지만 방황은 의외로 길어졌다. 이미 선택한 전공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한 2년 버티다가 결국 새로운 방향으로 돌아서야만 했다. 긴 세월의 방황이 참 고통스러웠는데, 방황이 끝날 때쯤에는 새로운 전공 분야를 선택하게 되었다. 기나긴 방황이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은 셈이다.

지금은 많은 나라들과 온 세상이 방황하는 듯한 시기이다. 이 시기가 끝날 때 쯤, 어떤 큰 나라는 많은 나라들로 쪼개져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경우가 있다. 강한 군사력을 지닌 큰 나라는 더 이상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만큼 주저앉게 될 것이라 기대하기도 한다. 오직 한나라만이 큰 목소리를 내는 시대로부터 다양한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시대를 기대하는 경우도 있다. 여러 나라들이 제각기 원하는 지점에서 방황의 끝을 맞이하기 위해 애쓰는 시기인 셈이다.

그런데 방황은 생각지 못했던 지점으로 방황하는 인간을 데려다 놓게 된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방황이 끝날 때 쯤 어느 나라도 그들이 기대하는 끝을 맞이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 나라들이 자국 안에 지니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많은 나라들이 특히 젊은 세대의 삶이 서로 깊이 얽혀간다는 점에서도, 시대의 방황은 예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곳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라 생각된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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