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들가리 울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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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수필가

싹씨를 내려 성장하기까지 고통을 통과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물며 욕망을 비벼대며 부대끼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신산스러운 길은 애추에서 쏟아져 나온 바위츠렁을 맨발로 걷는 기분일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울 큰언니가 그랬다. 언니에게 생의 결과물은 무엇이었을까?

8형제의 맏이인 큰언니의 인생이 흘러가는 구름처럼 눈앞에서 명멸한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언니는 우리 집 마당에서 연지곤지 찍고 시집을 갔다. 결혼식 전날 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잔치 준비를 하는데 어린 나는 머리를 벽에 짓찧으면서 밤새도록 울며 날 밝기를 기다렸다. 언니의 불행을 예시하려고 그다지도 머리가 아팠을까.

그 언니가 이제 팔순을 넘겼다. 백세시대에 팔순을 넘긴 것은 큰 사건이 아니다. 그런데 며칠 전 폐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그야말로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으며 애오라지 자식 건사에 몸을 부쉈던 언니, 언니 나이 겨우 36살에 갓 백일 지난 막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형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재산이라고는 빚으로 기둥을 이룬 시골 방앗간 하나 덜렁 있는 상태에서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었다. 여자 혼자 자식 넷을 건사하는 일은 날마다 바윗덩어리를 절벽에 올리기만큼이나 힘이 들었을 것이다. 엄마만 바라보는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해 노점상도, 남의 집 빨래도, 고물을 줍기도 하며 손 지문을 지웠다.

누구보다도 총명하고 손재주가 많았지만, 대를 이을 아들이 잘되어야 집안이 일어난다는 아버지의 강파름이 딸을 살림 밑천으로 집에 주저앉혔다. 맏이는 부모의 노동을 벌충했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곱 명이나 되는 동생들의 치다꺼리며 집안 안팎살림을 도맡았다. 인생을 강요된 희생으로 살아야 했던 원망과 분노, 여자 혼자의 힘으로 자식 넷을 키우면서 당한 고통과 질시, 서러움, 외로움, 가슴에 활화산같이 분출하는 꿈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푸른 멍들이 큰언니의 눈빛에서는 언제나 어른거렸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야, 막내야. 시내버스를 기다리다가 정거장 벽에 붙어 있는 시가 너무 좋아 적어왔는데 한번 볼래?” 하면서 삐뚤빼뚤 베껴온 시 수첩을 꺼냈다. 정신없이 적는데 버스가 와 한 줄은 외워서 차 안에서 썼는데 마지막 줄은 못 썼다면서 몹시 안타까워했다. 찌든 삶을 살면서도 마음 한편에 서정을 키웠던 언니, 애잔하기도 하고 언니의 모습이 낯설게 아름다웠다.

한 줄의 시가 삶 속에 머물면서 푸른 멍을 문질러 주고, 고단한 하루를 보듬어 위로해 주었을까. 그 덕인지 고난의 세월을 무던히도 견디어 돈 걱정 안 하고 살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감꽃처럼 시심을 감싸던 그런 언니가 언제부턴가 냉골여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고 했던가. 언니는 살아온 세월이 지겹다면서도 단돈 천 원도 주저주저하며 쓰지를 못한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사는지 알 수가 없다.

“언니, 이제는 살 만큼 사니까 그렇게 궁상떨지 말고 제발 언니를 위해서 좀 살아봐. 언니 나이가 지금 몇인데?” 하고 성화를 대면 말로는 “그까짓 돈도 다 필요 없더라.” 하면서도 노인 일자리를 찾아다니고 상자를 주워다 팔며 돈바라기가 되었다. 제발 지금이라도 자신한테 대접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울안에 갇혀 발을 내딛지 못한다. 야윈 그림자만 데리고 사는 고단한 삶, 형제들하고도 섞이지 못하고 벽을 만들기 일쑤다.

네 남매 자식들을 위해 마들가리로 살았던 큰언니는 지금 혹한의 겨울을 건너고 있다. 얼음이 얼었다 녹았다 몇 번 하다 보면 겨울마저 가버리겠지. 큰언니! 봄이에요. 어서 잎순을 열어 다시 꽃을 만들어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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