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내린 아침에 국화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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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구, 시인·수필가·前 애월문학회장

가을 햇살에 취한 감나무 열매들은 성글어지는 잎사귀와 반비례로 주홍빛 얼굴이 말갛게 짙어가고 있다.

홍시가 말갛게 제 색깔을 낼 때면 국화꽃 봉오리도 살짝 벌어지기 시작한다. 한 여름 연못을 가득 메우던 연꽃도 모두 스러지고,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국화뿐이다. 이제 곧 상강이다. 상강 무렵 새벽하늘 가득 서리가 내리면 모든 초목이 숨을 죽이고 내년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푸릇한 기운 여전히 머금고 여름 흔적의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던 풀들도 서리가 내린 날 아침이면 완전히 땅에 몸을 누이고 항복을 한다. 상강(霜降)에 내리는 서리는 강한 숙살지기를 품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과감히 이겨내고 피는 꽃이 바로 국화다.

필자는 서리가 내려 단풍이 떨어질 즈음에 매년 버릇처럼 천왕사 뒤쪽 전망대 바위에 올라 가을의 정취와 들국화 짙은 향기에 취해 본다.

바람에 나부끼는 노란 잎은 옷소매에 점점 떨어지고, 들새는 나무 우듬지에서 날아올라 사람을 엿본다.

황량한 땅이 이 순간 맑고 드넓어진다. 떨어진 잎은 스산한 풍광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고요한 산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세속에 덧없는 행보에 바쁜 나머지 우리는 생의 아름다운 향기를 얼마나 놓치고 있는가.

또한 숲속의 스쳐지나 가는 바람의 소리에 귀를 열고, 자칫 스산한 풍광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비바람 속의 낙엽조차 이 가을을 생동감 있는 계절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상강 무렵이면 춘삼월 봄 동안 온갖 꽃이 피는 시절은 그냥 보내고 나뭇잎 떨어지는 추운 계절이 되어서 피어나는 국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진 서리를 이기고 꽃을 피우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느낀다.

애월읍 관내 모 중학교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국화 전시회를 열곤 한다.

몇 년 전 일요일이었다. 느지막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하릴없이 마당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국화 전시회를 하고 있는데 구경 가자는 것이다. 전시회라고는 가본 적이 없는 필자에게는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친구들과 반나절을 보낼 생각에 무심히 따리 나섰다. 국화 전시회는 내게 국화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국화의 오상고절이 새롭게 다가오는 계절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찬 서리 내린 뒤에 꽃을 피우는 모습은 네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그 힘든 현실을 딛고 아름다운 빛과 향기로 피어나는 국화야말로 이 땅의 몇 안 되는 올곧은 길을 걷는 지식인 상징으로 사랑받아 마땅하다.

보통의 대부분 사람들은 올곧은 길을 걷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 길을 벗어나거나 포기한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근엄하고 덕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속으로는 시속에 따라 이리저리 오가는 유약한 인간의 유형을 ‘공자’는 논어 양화 편에서 소인배 같은 도적이라고 했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적당히 폼 나는 말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슬그머니 발을 빼는 유형이야말로 우리가 매일 자주 마주치는 이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의 형태가 아닌가. 사회가 새로운 변화를 얻는 것은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힘차게 지평을 열어젖히는 지식인들의 올곧은 발 디딤 덕분 일 것이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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