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한 도구로 드로잉한 은지화
뾰족한 도구로 드로잉한 은지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 논설위원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유화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아이패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기술적 수단만 바꿔 그리고 있을 뿐 여전히 손으로 드로잉을 한다. 그래서 그는 미술은 진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미술의 개념 가운데 ‘원시미술’이란 용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원시(primitive)’라는 용어에는 이미 미술이 진보한다는 가정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은 코뿔소를 그린 것인데 3만 년이 지난 지금 시대에 봐도 생동감이 있어서 퇴보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진보라는 말대로라면 근현대 그림들이 중세의 그림보다 더 좋다는 말이 된다. 어디 그런가. 오히려 피카소는 약 2만 년 전 알타미라 시대 이후, 미술이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고 하면서 최고의 그림들은 최초의 동굴 그림에서 나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알타미라 이후 더 오래된 3만 년 전의 그림이 쇼베 동굴에서 발견되었는데 길이 약 400미터 동굴 벽에 검은색 선묘로 그려진 코뿔소 이미지 등 13종의 동물 그림들이 알타미라 동굴 그림보다 더욱 현실감이 있었던 것에 놀랐다.

쇼베 동굴의 그림들은 드로잉 위주로 그려졌는데 동물의 생태적 특징을 잘 관찰하고 그린 것이었다. 코뿔소는 마치 해부학을 잘 아는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 단순하면서도 매우 힘찬 동작과 골격으로 표현되었다.

드로잉은 3만 년의 시간을 지나온 것이다. 인류 최초의 그림처럼 우리는 여전히 미술대학에서 데생을 기초로 다루고 있다. 미술은 3만 년 전과 수단만 달라졌을 뿐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중섭 그림의 특성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선묘(線描), 즉 드로잉이다. 선이 자유롭고 활달한 것은 마치 돌고래가 바다에서 해저와 해상을 자유롭게 오가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과 같다. 이중섭은 연필, 크레용, 펜, 붓, 목탄, 송곳과 같이 끝이 뾰족한 도구 등 다양한 재료로 드로잉을 시도한 작가로도 유명하며 재료의 특성에 따라 명작을 남겼다.

연필로 드로잉한 작품으로 <세 사람>이 있다. 세 명의 사람들이 원형 구도로서 앉거나, 눕거나, 엎드린 자세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작품이다. 가는 선들이 겹치면서 만들어내는 선의 아름다움에선 약간의 슬픔의 감정도 묻어난다.

크레용 드로잉으로 유명한 작품은 <나무와 노란새>이다. 겨울 잎이 다 떨어진 스산한 나무에 앉은 두 마리 새와 날아가는 한 마리 새를 배경으로 그린 작품에서 찬 겨울임에도 따스한 정감으로 대화를 나누는 듯한 새가 정겹다.

펜 드로잉으로는 <가족을 그리는 화가>라는 작품이 있는데 펜을 중심으로 하여 채색을 한 그림으로 이중섭 자신이 화판에 네 명의 가족을 그리는 그림이다. 가족 사랑의 절절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붓의 드로잉 작품으로는 소 시리즈가 유명하다. 소의 격정적인 움직임을 빠른 속도의 붓 터치로 포착하여 거칠지만 강렬한 역동성을 뿜어낸다.

이중섭의 독창적인 작품은 서양미술에 없는 재료인 은지에 송곳 등 끝이 뾰족한 도구로 드로잉한 은지화이다. 이중섭 생전에 대구미문화원 원장이었던 맥타가트는 전시하고 있는 은지화 3점을 구입하여 1956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보냈는데 기증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중섭은 MoMa의 소장 작가가 되었다.

은지화는 그 형식이나 내용이 매우 한국적이기 때문에 이중섭을 국민화가로 우뚝 서게 만든 작품인지도 모른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