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육지 나강 조용히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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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그는 그 시절 제주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첫 시험에 떨어졌지만 공부가 부족해 그런 거라 생각했다. 다시 열심히 공부하던 중에 경찰인 먼 친척으로부터 “공부 하지 마라. 공무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냐”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작은아버지가 4·3 때 희생된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앞길을 정면으로 가로 막을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기막힌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아버지에게 따져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다가 한참 후에 “야! 너, 육지 나강 조용히 살라”하시고는 입을 닫으셨다. 그는 왜 공무원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고 아버지가 왜 육지 가서 살라고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께 대들 기세와는 달리 아버지 한마디에 아무 말도 못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아니다 하면 아닌 것이었다. 결국 제주를 떠나 육지로 나갔다.

포항으로 갔다. 포항은 일자리 찾아다니는 젊은이들에게 로망이었다. 포스코(posco)에 입사원서를 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불합격이었다. 그런데 회사 관계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신원조회에서 떨어졌지만 다시 시험을 보라 했다. 아니 불합격됐는데 어떻게 다시 시험을 보라고 하냐고 따져 물었다. 관리직은 떨어졌지만 생산직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생산직으로 합격했다. 40년을 열심히 일했다.

그는 청운의 꿈도 버리고 떠난 고향 제주가 그리웠다. 제주에 가고 싶었다. 작은아버지 생각도 났다. 고향을 등지게 만들었던 작은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1948년 4월 무렵 어느 날 낯선 청년들에게 잡혀갔다.

그 일로 할아버지는 지서에 잡혀갔다. 할아버지는 무지막지한 고문 끝에 집에 올 수 있었다. 가족들은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할머니만은 집을 지켰다. 피신하면 아들은 영영 입산자로 몰릴 것이라면서 집을 지켰다. 집을 지키시던 할머니는 결국 총살당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나머지 가족들은 제주를 떠나 부산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산에 살던 할아버지 집에 작은아버지 소식이 전해졌다. 작은아들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작은아들을 면회했다. 면회 이후인 1950년 음력 2월 7일, 작은아들이 형무소에서 죽었다는 옥사통지서가 전달되었다. 시신을 수습할 형편이 못되었다. 낯선 곳 피난살이 설움은 말할 수 없이 곤궁했다. 한국전쟁 이후 할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 학교선생을 했던 아들이었고 4대 독자였던 아들의 시신을 찾아 서울 천지를 헤맸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들을 가슴에 묻은 할아버지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72년의 생을 마쳤다.

아버지도 106세 나이로 작년에 돌아가셨다. 평생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도 함께 묻고 떠나셨다. 그 시절 무고하게 죽은 동생의 죽음에 대해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제사를 정성스레 모시는 것 밖에는. 아버지는 작은아버지가 옥사한 음력 2월 6일에 제사를 지냈고 그 뒤를 이어 그가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는 두 집 살림을 한다. 포항 집과 고향 제주 집을 왔다 갔다 한다. 작은아버지 전력으로 공무원의 꿈도 접고 육지로 가야했던 그는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한 작은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고향집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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