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정체를 알 수 없을 때 극심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질병에 무방비 상태로 당하면서 생긴 막연한 불안이 일상을 뒤흔든다. 예방접종을 하고 개인위생에 신경을 쓰면서도 전염병 앞에서는 꼼짝없이 겁이 난다. ‘코로나19’ 기세가 한풀 꺾이는가 싶었는데, 새로운 바이러스 소식이 뉴스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온몸으로 번진 수포를 보면서 어릴 적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어느 날 공회당에서 예방접종을 한다는 소식이 온 동네에 퍼졌다. 일손이 바쁜 아버지 대신 나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주사를 맞으러 갔다. 장터를 지나 면사무소 앞에 도착했을 때는 순서를 기다리는 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엄청 아픈 주사라는데.’
뭔지 모르지만, 마음속에 일어나는 두려움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지루한 기다림이 계속되었다. 길게 늘어선 줄은 좀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따가운 땡볕 아래 줄은 어느새 구불구불 그늘로 찾아 들었고, 어른들은 모여 앉아 농사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올해는 가뭄이 심해 곡식이 다 말라 죽겠다느니, 영농대금을 제하고 나면 또 빚더미에……’ 라는 하소연을 늘어놓았지만, 내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무더운 여름, 포플러 나무에 붙은 매미들이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악머구리처럼 울어댔다. 온몸을 비틀며 투정을 부려도 보았지만, 할머니 손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줄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천막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 사라지자 아이들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안 그래도 주사가 무서운데, 울음보가 터진 아이들이 부모님 손에 이끌려 나오는 모습을 보자 두려움이 하늘을 찌를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저만치 앞에서 누군가 불주사를 놓는다는 소리를 했다. ‘주사도 무서운데 불주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안한 내 모습에 할머니가 주사는 그저 따끔하면 그만이라며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나는 천막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했다. 내 차례가 거의 다가왔을 때 고개를 빼 들고 천막 안을 기웃거렸다. 그때 한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부모님 손에 양팔이 꼭 붙잡힌 아이는 이미 울음보가 터졌고 간호사가 팔뚝에 주사를 놓자 자지러지듯 소리를 질렀다.
순간 나는 할머니 손을 뿌리치고 도망을 쳤다. 뒤에서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신작로를 내달렸다. 장터를 가로질러 봇도랑을 건너뛰고 논둑길을 따라 개울로 달아났다. 얼마나 정신없이 달렸는지 온몸에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무 그늘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쿵쾅거리는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풀밭에 누워서도 그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긴장이 풀린 듯 정신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잠결에 할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뉘엿뉘엿 어둠이 내리는 제방 둑 위에서 할머니가 나를 찾고 있었다.
다음날 보니 친구들은 팔이 퉁퉁 부어있었다. 개중에는 밤새 고열에 시달리며 심한 몸살을 앓은 아이도 있었다. 서로 주사 맞은 팔을 툭툭 쳐가며 짓궂게들 장난을 쳤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기겁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를 일이었지만 내 마음속에서 두려움과 안도감이 묘하게 일었다.
의학이 발달할수록 병원을 찾는 일이 늘어나며 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겠지만, 내 마음속에 잠재된 불안감은 치유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나의 예방주사 경험은 영역 바깥에 있는 듯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 어깨에는 낙인처럼 찍혀있어야 할 예방주사 자국이 없다. 마음 안에서 피어오르는 공포와 절망감이 너무 크다. 그런 반면에 질병과 노후의 삶에 대해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아픈 것은 당연하고 또 다른 존재의 방식이라고…….’
태어났기에 늙고, 늙기에 아프고, 아프기에 죽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누구나 모두 병이 든다. 단지 순서의 차이일 뿐이다. 불안하지만 예방주사를 맞기 위해 슬그머니 옷을 챙겨 입고 나는 병원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