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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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논설위원

1993년의 일이었나 보다. 최근 이태원 핼러윈 대참사 보도를 접하면서, 옛날 딸아이와 대전 엑스포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어머님과 형님, 조카와 딸,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사람이 함께하였다. 입장권을 구하고자 줄을 섰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리저리 밀려 전혀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순간 나는 이러다가 누군가가 넘어지면 사람에 깔려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형님과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어깨를 잡아 단단한 틀을 만들어, 그 안에 조카와 어머님을 들어가시게 하고, 나의 어린 딸은 내 목마를 태워 버텼다.

얼마간을 밀려 나가다가 바로 옆에 큰 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겨, 늘어선 줄이 느슨해지기를 기다렸다. 사실 그때 나와 형님은 어머님과 자식들을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버텨야 했고, 힘이 부쳐 그대도 밀려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두려워했다.

혹 닥칠지도 모르는 마지막에 대비하여, 밀려서 넘어지게 되더라도, 어린 딸만이라도 사람들의 발밑에 깔리지 말라고, 아이를 목마 태워 보호하기에 사력을 다하였다.

그때 그 딸이 성장하여 지금은 기자가 되었다. 사건이 벌어졌던 날, 혹시 취재하러 가서 현장에 있지 않았을까 걱정되어 전화했더니, 이제는 현장취재를 할 짬이(위치가) 아니란다. 딸은 그때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딸은 “어릴 적 기억 때문에, 설령 그 장소에 갔다손 치더라도, 대중 속에 쓸려 있지는 않았을 것이에요.”라며 나를 안심시킨다.

이번 희생 당한 젊은이 중, 몇 사람은 곧 있을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휴대폰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동영상으로 남기기까지 했다고 하니, 넘어지면 곧바로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는 한 여인이 상황의 위중함을 인식하여 소리 질러 정리하였다는데, 그때도 누군가가 나서 정리하였거나, 처음부터 질서가 잘 지켜졌다면 아무 일 없었을 터인데 안타깝다.

이 엄중한 상황까지도 정쟁으로 삼는 자들이 있다. 입으로는 애도를 표한다지만, 영혼 없이 나불거리며 저희끼리는 뒤에서 히죽거린다.

아무리 큰 사고라도 그 시작은 미미하다.

위험한 순간에 한 무리의 사람이 “밀어”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정말 의도한 자들이 있었을까? 사실이라면 그들의 이런 무모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한순간에 희생당한 것이다. 그 대상이 당신의 동료일 수도 있었을 터인데, 밀기는 왜 밀었니?

질서란 축제장을 몰려다니는 사람들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랏일도 모두가 물 흐르듯 순리에 따라야지, 억지로 밀어붙이면 그 결과는 참담할 뿐이다. 당신들만 살겠다고 상대를 밀어붙이면, 끝내는 당신을 포함한 모두가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들이 모시는 주군은 강력한 지배자이니 그대들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하려 하는가? 주군을 위해 말하지 말고 진실을 위해 말해야 한다.

사슴을 보고 말(馬)이라고 하지 않으면 한 자리를 얻을 수 없는가? 마치 폭군 걸왕이 기르는 개가 성군 요임금을 보고 짖는 것과 같이, 오직 자기들에게 자리를 준 주인이랍시고, 도둑질한 상전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며, 순진한 사람들을 몰아붙이고 있으니, 저들 몇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앞날도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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