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와 공감 능력 제로의 권력자
이태원 참사와 공감 능력 제로의 권력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오대혁, 시인·문화비평가/논설위원

네가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애도와 진상규명, 그리고 책임자 문책과 배보상 등의 문제로 한동안 방송은 소란스럽겠지.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방송은 잠잠해질 것이고, “다시, 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 다시, 너를 눕힐 수 없는 침대 / 다시 너를 덮을 수 없는 담요 / 다시, 너를 비출 수 없는 거울…”(나희덕, 「다시, 다시는」)만이 휑뎅그렁하게 놓여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네가 남긴 그 고통과 슬픔이 어찌 사라질까.

한국문학의 맨 앞에 놓인 「공무도하가」를 생각한다. 물을 건너지 말아 달라고 하소연하지만 결국 물에 휩쓸려 돌아가신 임을 어찌할 것이냐는 한국 최초의 서정시. 고조선 때 불리기 시작해 조선 시대 한치윤의 『해동역사』까지 여러 문헌 기록으로도 남고 중국의 문인들도 끝없이 노래하고, 현대 들어서도 김훈의 소설과 이상은의 노래며 영화로도 수용되었다. 수많은 이들은 무엇에 공감한 것일까? 가슴을 울리는 고통과 슬픔의 공감이 없다면 절대로 이런 장구한 세월을 이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과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인데, 그 가운데서도 눈앞에서 참혹한 죽음을 지켜보아야 할 때다. 그 슬픔을 어디에 비길 수 있겠는가.

4·16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가 다르지 않은 같은 선상에 있는 까닭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여객선 세월호에 있던 학생이 최초로 신고하면서 던진 첫마디가 “살려주세요.”였고, 이후 가족과 국민들은 점점 물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생때같은 아이들을 TV를 통해 보아야 했다. 이태원 참사 역시 일찌감치 사고를 염려한 이들의 신고가 4시간 전부터 이어졌지만 끝내 서울 한복판에서 158명의 꽃다운 젊음이 스러져가는 걸 TV를 통해 보고 말았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잃는 고통을 참척(慘慽)이라 할진대, 당해 보지 않은 이가 어찌 그 참혹함을 헤아릴 수 있으랴. 그런 일을 두고도 책임 회피에만 골몰하는 국가 책임자들의 작태에 울분을 참을 수 없다.

우리는 공감 능력 제로인 대통령과 권력자들을 본다. 침수된 반지하 앞에서 “왜 미리 대피가 안 돼나?”라 하고, 골목길 현장에서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다고?”라며 묻는 무표정한 대통령을 본다. 그리고 9일 만에야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라는 사과를 하며 마음만 책임을 지겠다고 하고, 실제 모든 책임을 경찰과 소방에 전가하는 대통령의 호통을 듣는다.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를 세우겠다던 검사 출신 대통령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헌법 제34조도 무시하고, “제6조 행정안전부 장관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행하는 재난 및 안전관리 업무를 총괄 · 조정한다.”는 조항도 무시한 채 행정안전부장관을 끼고 돌며 경찰관들만 문제 삼는다.

권력 유지의 원천으로 대커 켈트너(Dacher Keltner)는 네 가지를 언급한다. 그 첫 번째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최대 선을 증진하는 공감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과의 나눔, 세 번째가 깊은 유대감을 조성할 수 있는 고마움의 표현, 네 번째가 대의를 위해 사람들을 한데 묶는 스토리텔링에 있다고 한다.(『선한 권력의 탄생』) 그 반대 지점에 권력의 상실이 자리한다. 윤 대통령과 여당은 공감 능력과 책임 의식을 상실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라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가슴 시리게 다가선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