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유혹
계절의 유혹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이애현 수필가

계절의 유혹이다. 장난기 섞인 바람은 들판의 터줏대감인 양, 옷깃을 들추며 파고든다. 그 바람의 냄새가 그지없이 좋다. 걷기엔 그만인 날씨다. 발길보다 먼저 졸래졸래 따라나서는 햇살 또한 야무지다.

만추. 이 고운 계절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주차장은 벌써 붐빈다. 삼삼오오, 더러 무리 지어 이곳을 찾은 이들과도 마주했다. 두리번거리다 가까이 있는 팀과 서로 눈이 마주쳤다. 닮은꼴이다. 순간의 멋쩍음을 저쪽 팀도 거의 동시에 느꼈는지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서로는 그 멋쩍음을 갈무리한다. 마지막 점검 차 배낭이며 모자를 챙긴 후 기다리느라 더러 서 있기도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연 속 일부가 사람인지, 사람 속의 산이 그 일부인지 헷갈릴 정도다. 입고 나온 옷차림의 색감들만 봐도 단풍 든 산의 그것과 퍽이나 닮았다.

멀리로 눈을 주니 병풍처럼 빙 두른 듯, 오름과 오름이 이어지며 정경 따라 능선은 부드럽게 끊기고 잇기를 반복한다. 오름은 출발하는 위치에 따라 급경사에서 시작하여 완만하게, 혹은 완만하게 시작하면 반대로 등성이에서부터 정상부분까지 경사도는 대체로 가팔랐다. 어느 쪽을 택하든 힘들긴 매한가지다. 이 일대 오름을 오르기로 하고 우리일행은 걷기 시작했다.

만산홍엽. 나지막한 곳에서부터 등성이로 이어지며 하늘향한 나뭇잎들 가을햇살 한 줄기 보태자 색색이 고운 얼굴들이다. 살랑거리다가 떨어져 뒹구는 낙엽 두어 개를 주워 손바닥에 조심스레 펴 보았다, 손바닥에도 물드는 것 같다. 초록이 스러진 곳에 온통 붉은색 이파리와 두 살배기 손자 녀석이 좋아하는 타요 노래에 등장하는 색깔고운 장난감처럼 단풍이 선명하다.

돌계단을 오르며 등산로는 밋밋하게 이어지나 했는데 또 가파르게 오르막이다. 발이 무거워 더는 한 발짝도 못 디딜 것 같은 그곳이, 맞다 거기가 정점이다. 오르기 전에는 완만해 보였는데 지치다. 잠시 올려다 본 자리에서 굽어지는 거기까지가 시계의 한계다. 땀으로 등줄기도 힘들단다. 한 걸음 딛기도 버겁고 들숨과 날숨 사이로 뱉어내는 숨은 턱에 닿고 숨소리 또한 짧고 거칠다.

잠시 후, 탁 트인 정상에서 만난 바람은 오르는 동안의 힘듦을 보상이라도 하듯 거침없이 온몸으로 달려든다. 상쾌하다. 계절이 다투며 들어왔다. 이어 오름 타던 바람은 분화구를 향해 달린다. 말굽형 분화구를 중심으로 거친 바람에 호들갑 떨던 억새들 숨죽이며 바람 따라 드러눕는 몸놀림이 심상치 않다. 가끔씩 까불거리며 햇살이 농담 걸 듯 다가서자 누운 자리마다 빛을 발산한다.

바람의 색깔이 이 색이었을까. 일어나고 눕고를 반복하는 동안 분화구 모양 따라 둥그렇게 움직임마다 번들거린다. 금색인가 하여 다시 보면 은백색인 것도 같고 오묘함이다. 곱다, 참 곱다. 멀리로 보면 바람은 한 방향으로 친한 척 억새들을 죄 불러들이는데, 코앞에서는 갈피 못 잡은 억새들이 허둥댈 뿐 딴짓이다.

처처에 계절 닮은 색이 그득하다. 에움길에서 고목의 잔등에 붙어 여리여리한 모습으로 행인의 눈길을 반기는 좀딱취의 연보라 꽃과도 계절을 이야기했다. 손톱만 한 것이 파란색 꽃을 종종 매달아 놓은 들꽃과도 이 가을을 함께했다. 부대끼고 흔들리며 정연한 계절의 질서가 다가올 절기를 위해 우리의 곁에서 한 발 한 발 뒤물러서고 있다. 가을, 이 계절에 흠뻑 취하고 싶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