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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아파트 뜰로 낙엽이 흩날리다 구른다. 벚나무 광장이 낙엽으로 덮인데다, 바람에 날리는 잎으로 난장이다. 가을 분위기가 절정을 치고 있다. 언젠 어떤가. 철이 오면 소스리바람이 제 차례라는 듯 몫을 한다고 기세등등이니.

이쯤에서, 청소 아줌마들이 밤새 쌓인 낙엽을 쓸다 손을 놓아 버린 모양이다. 툭툭 낙엽이 진다. 늙은 벚나무 숲에서 지는 낙엽이다. 쓸어 봤자 말짱 도로다. 돌아서면 쓴 자리로 또 지는 낙엽을 감당할 재간이 있겠는가. 아파트 뜰에 며칠쯤 낙엽이 쌓여 있으면 어떤가. 자체로 가을의 정취인 것을. 그대로 놔두면 주민들이 가을의 뜰을 거니는 빌미가 될 것인데. ‘낙화도 꽃인데 쓸어 무엇하리오.’라 한 옛 시처럼, 낙엽은 잎이 아니랴 쓸어 무엇 할 것인가.

가을 한철 그냥 두어 떡갈나무 숲 아래 일면으로 쌓인 낙엽을 연상케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연일 비질해도 막무가내일 바엔 그냥 놓아두는 게 상책일 것 아닌가.

그닥 맵지 않은 바람결에 여린 볕이 좋은 날, 이런 날은 밖으로 내려 아파트 둘레 오솔길을 거닐면 좋다. 둘 다 몸이 편치 않지만, 아내와 함께 13층에서 내려 흙을 밟기로 한다. 붉게 물든 벚나무숲이 눈길을 꺼당긴다. 야산의 단풍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불그스름하니 제법 곱다. 여기저기 흩어진 낙엽이 걸음걸음 밟히며 사각거린다. 아파트 뜰을 거닐며 구루몽의 시 <낙엽>을 입에 올리게 됐으니, 이런 황홀할 데가 있으랴.

동 둘레를 몇 바퀴 돌다 숲 아래 널빤지를 깐 의자에 앉는다. 무릎이 부실한 아내도 무슨 트롯 한 구절 흥얼거리며 몸을 기대고, 지팡이에 의탁한 나도 분위기에 젖어 들어 눈이 붉어 있다.

아내 머리 위로 싯누런 벚나무 잎이 툭툭 진다. 바람 탓인가. 소리가 유난히 크다. 그 기척에 쳐다보며 웃는데, 이번엔 내 얼굴 위로 잎 두엇 툭 하고 소리 내며 진다. 내 웃음기가 지워지기 전에 아내의 웃음이 내게로 흐른다. 웃음과 웃음이 절묘하게 겹치는 순간이다. 그 순간, 눈길이 마주쳐 또 한 번의 웃음이 서로의 입가에 번진다. 카타르시스다. 눈물이 아닌 웃음도 마음자릴 이렇게 맑게 하는구나.

지나던 유모차가 우리 앞에 멎는다. 이따금 만나는 두 살 아기다. 첫 만남에 눈 똥그랗게 떠 손을 흔들었었지. 시나브로 낯가림이 줄어들며 우리에게 다가오던 아기. 며칠 전엔 우리를 보자 유모차에서 내려 새로 신은 하얀색 신발을 자랑했었지. 한쪽 발을 무릎까지 들어가며.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데, 갑자기 아내가 아기에게 달려든다. 젊은 엄마의 손길을 뿌리치며 아기 손에 꼬옥 쥐어주질 않나. 붉은색 지폐 한 장. 돈을 알까. 유모차는 나아가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아기. 아이들 키우던 시절을 떠올렸을까. 아내를 쳐다보며 그냥 웃기만 했다.

또 한 컷을 그려내고 있다. 막 우리 앞을 승용차가 지나다 문뜩 서더니 창을 내린다. “두 분 앉아 있는 모습, 참 아름답습니다.” 상기 띤 얼굴로 말을 건네 오는 중년 여인. 반면식도 없는 분이라 계면쩍게 웃는데, 왠지 어중간하다. 늙은 부부가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눈 것뿐인데, 무엇이 그리 아름다워 보였을까. 이곳 주민일까, 무얼 하는 분일까.

“들어갑시다.” 아내의 손을 잡고 일어서다 마주 보며 웃는다. 서편엔 한창 타는 노을, 밤으로 가는 풍경이 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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