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소깍 유감(有感)
쇠소깍 유감(有感)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오상학,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논설위원

제주도의 명승지 중에서 한라산 북쪽의 용연이 있다면 한라산 남쪽에는 쇠소깍을 들 수 있다. 산북의 대표 하천인 한천이 발원하여 탐라계곡을 거쳐 하구에서 못을 이룬 것이 용연이고, 산남의 대표 하천인 효돈천이 산벌른내를 거쳐 하구에 형성된 절경이 쇠소깍이다. 쇠소깍은 ‘쇠소’와 ‘깍’이 결합된 지명으로 ‘쇠소’는 효돈천 하류의 용천수와 바닷물이 만나서 이루어진 깊은 못을 말한다. ‘쇠둔’이라는 옛날 하효 마을의 지명과 ‘소(沼)’라는 못 지명을 합쳐 ‘쇠소’라고 했다. ‘깍’은 하천의 하구 부분으로 바다와 만나는 곳을 일컫는 제주어다. 따라서 쇠소깍은 쇠소와 하구 부분의 바닷가를 통칭하는데 기암절벽과 나무, 맑고 푸른 물이 조화를 이뤄내며 절경을 이룬다.

이러한 비경을 지닌 쇠소깍은 과거 주민들의 성소로서 인식되어 왔다. 울창한 나무로 가려진 깊은 못은 신비감을 넘어 경외심까지 들게 한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이곳에 해신당을 마련하여 용왕신에게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치성을 드리고 난 후 제물을 못에 던지면 뛰어오르는 숭어들이 치성의 효험으로 회자되곤 했다.

쇠소깍은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처음에 쇠소깍 위쪽 효돈천의 냇가에서 헤엄을 치며 놀다가 어느 정도 수영 실력이 늘면 쇠소깍으로 내려와 하천의 양안을 가로질러 헤엄쳐 건너가며 놀곤 했다. 이를 ‘동깡 건너기’라 했는데, 수심이 깊어지는 밀물 때 ‘동깡 건너기’에 성공하면 수영 실력을 인정받는다. 이러한 쇠소깍은 1970년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동네의 명소였다.

용연의 경우 조선시대 제주목의 읍치와 관리들뿐만 아니라 시인묵객이 즐겨 찾던 명소였으나 쇠소깍은 제주목이나 정의현, 대정현 관아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조선시대 문헌에 쇠소깍에 대한 기록은 찾기가 힘들다. 1930년대 한국을 답사하여 『코리아』라는 한국지지를 쓴 독일의 라우텐자흐가 쇠소깍을 답사하여 쇠소깍 사진을 책에 수록한 것이 최초가 아닐까 한다. 그는 당시 쇠소깍이 담팔수나무 자생지로 이름 나 있어서 이를 조사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이처럼 한적하고 외지인의 발길이 뜸하던 쇠소깍이 2011년 국가명승 제78호로 지정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쇠소깍에 이르는 좁은 길이 넓혀지면서 외부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곳에서 전통배인 테우와 카약 체험이 이루어지면서 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테우와 카약 체험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면서 개인 사업자와 하효 마을회가 사업권을 놓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쇠소깍에서 상업적 목적으로 테우와 카약 체험을 운영하면서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 쇠소깍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위치한 하례리 마을회에서 쇠소깍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쇠소깍이 하례리와 하효 두 마을을 접하고 있는데 한 마을에서 사업의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마을 간의 갈등으로 번졌다. 다행히도 두 마을간 법정 분쟁으로 이어지기 전에 제주도에서 갈등조정협의회를 구성하여 합의를 도출하면서 갈등이 일단락되었다. 제주도의 공유자원을 둘러싼 마을 간의 갈등은 앞으로 계속 발생할 여지가 많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공유자원을 새롭게 인식하고 공익적으로 활용하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