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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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재릉초등학교 교장·수필가

마치 벼르기라도 한 듯 12월의 문턱을 넘자마자 찬 바람이 연일 강타한다. 서울에는 첫눈이 내렸다고 방송마다 알려온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부츠에 패딩 재킷을 입고 등교 맞이했다. 해변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귀마개도 한 아이들도 보인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도란도란 오솔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아기자기한데 종종 발걸음 따라 낙엽들만이 이리저리 뒹군다. 아침 등교 맞이하고 서둘러 벚꽃 동산으로 향했다.

학교 운동장 넓은 잔디밭의 동쪽 구릉지에 아름드리 벚꽃 군락지가 있다. 차 준비실에서 바라볼 때마다 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추운 날씨 탓에 아이들도 사라진 오솔길의 조그만 벚꽃 동산은 조용했다. 잎이 다 진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서 있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어느 한 가지도 서로 겹쳐 뻗어 있는 것이 없다. 서로의 영역을 피해 팔을 뻗고 있다. 이다지도 조화로울 수 있을까.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나뭇가지 따라 흔들린다. 가지 손끝마다 조각 하늘이 걸려 있다. 벤치 위에 내리는 햇빛의 반점들. 알싸한 나무와 생명을 다해가는 누런 잔디, 흙의 향기가 포근하게 느껴진다. 밖은 찬바람만 휑한데 이곳 벚꽃 동산은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하다.

성성했던 잎이 진 자리마다 엽흔이 달려있다. 엽흔, 잎이 달렸던 흔적이다. 잎의 숨결이 스며있다. 아름답던 꽃이, 무성했던 잎이 살다간 흔적들이 한 땀 한 땀 바늘 자국처럼 선명히 남아있다. 마치 손금처럼 내가 살다가 흔적을 말해주듯이…. 생생했던 살아있던 날들의 기록, 물과 영양분을 부지런히 나르던 흔적들. 두 손으로 감싸 안아도 모자랄 나무 기둥은 단단하고 옹골차다. 가만히 손을 갖다 대니 생명의 숨결이 선연하다.

내가 살다 간 흔적들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겨울 숲에 홀로 서서 앙상히 남은 빈 가지를 바라보며 생각해 본다. 위로가 되는 건 어느 것 하나 그 잎자국의 흔적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답지 않은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예쁘다는 걸 어느 누가 자세히 들여다봐 줄까. 누가 내 살다 간 흔적을 그리워하며 되돌아봐 줄까.

구릉지를 한 바퀴 돌고 나오려는데 휘 늘어진 가지 하나가 내게 손을 뻗듯 가로막는다. 벚꽃이 한창일 때 아이들이 꽃잎을 베어 물고 사진을 찍었던 그 나무 아래다.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아주 작은 봉오리가 봉긋이 올라 새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무는 벌써 새 생명을 잉태하고 긴 겨울을 버티며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알아. 너의 삶을 다 기억해’ 꿋꿋이 바람 따라 휘파람 불며 서 있는 나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어느 봄날 연둣빛 싹이 옹글옹글 올라와 잎이 나기도 전에 흐드러지게 연분홍 꽃을 피워댔지. 그러다 초록으로 변하여 여름날 햇살 아래 그늘은 얼마나 참 시원했니. 진짜 고마웠어. 가을엔 붉고 노랗게 얼마나 황홀하게 알록달록 물들던지. 그게 바로 너였어. 나는 다 기억해!

너는 사라지지만 네가 있던 흔적 위에 새로운 생명이 움튼다. 나무처럼 내 살아온 흔적이 내 후손이 살아갈 새로운 터전이 되니, 나도 잘살아내야지 싶다. 나무가 계절의 순리에 맞게 지내는 것처럼 누구와도 자연스레 내 삶의 속도를 잘 걸어가야겠다. 누군가 내 살아온 40년의 교단 흔적을 아름답게 기억해 준다면 그나마 내 삶의 소박한 소임을 다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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