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했어요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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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동생과 전화가 오고 간다. 종종 동생에게 “언니, 괜찮아. 잘했어.” 이런 응원을 받는다. 어떤 일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갈등을 겪다, 최선책으로 결정을 내리고자 생각을 묻곤 한다. 만나서 나누는 대화보다, 오히려 전화로 하는 대화가 더 밀도가 높을 때가 있다.

물론 나 역시 동생처럼 귀 기울여 의논을 받아준다. 서로 “잘했어. 괜찮아.”하고. 어느 때부턴가 사소한 일에도 아무런 부담 없이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혼자 내린 결정보다 힘을 얻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면으로 넘쳐 모자람이 없는, 동생인 듯 언니인 듯 의지하며 우리 자매는 서로 기둥이 되어 준다.

두 아이를 키울 때 엄격하게 키웠다. 따뜻한 칭찬과 격려를 별로 해주지 못했던 것 같다. 살면서 가장 후회스럽고 미안한 부분이다. 이렇게 쉬운 말인데 왜 그리 인색했는지. 들어서 기분 좋고 더 높게 비상을 위한 동기부여가 됐을 텐데.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늘에 둥둥 흐르는 구름처럼 띄워 키워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잘 자라 사회에 나갔어도, 어미의 마음자리엔 늘 아쉬움이 남아 있다.

유대인 부모는 자녀를 유치원에 보낼 때, 두 가지를 명심해라 당부한다는 글을 읽었다. ‘첫째, 네가 말하는 시간의 두 배만큼 친구가 하는 말을 들어라. 둘째, 어떤 경우에도 친구 험담을 하지 말아라. 유대 경전 마드라시에 이런 말이 있다. 남을 헐뜯는 험담은 살인보다도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으나, 험담은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인다. 곧 험담을 퍼뜨리는 자신, 그것을 말리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그 험담의 대상이 된 사람이란다.’

이 글을 읽으며 인성 교육의 첫 단추 끼우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했다. 우리 교육은 어릴 적부터 무엇부터 시작했는지. 나는 어떻게 가르치며 키웠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칭찬과 격려가 전부가 될 수 있는가. 인성 교육은 사회를 따뜻하게 하는 밑거름이자 자양분이다. 이런 교육을 철저히만 했어도, 오늘날과 같이 서로 비방하며 헐뜯는 편 가르기 사회는 안 됐으리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 사회는 걸핏하면 ‘법적 대응’이란 말을 쉽게 남발한다. 특히 정치인이나 고위직, 심지어 일반인까지. 대수롭지 않게 법을 얘기하는 통에 신물이 날 지경이다. 옳고 그름을 대화로 풀어 해결하겠다는 말은 이미 실종된 지 오래다. 법대로 하겠다는 것은, 법이 그만큼 가벼워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법이란 신성한 것, 나라를 지키고 다스리는 기본이자 규범인데, 아웅다웅 싸우다 결국 법으로 해결하겠단다. 용서와 화해가 없는 사회는 개인의 이기주의와 맞물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력을 잃기 쉽다. 상대방 얘기에 진지하게 경청하는 사회, 평화로운 나라로 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한다.

전 세계는 자국 보호주의로 시대로 가고 있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시달렸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경제와 정세가 매우 어렵다. 이 틈에서 우리나라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그러나 국익을 위한 정책은 뒷전이다. 타협과 양보, 배려도 없이 상대의 말에 귀담아듣질 않는다. 언제쯤 국회나 정부에서 하는 일에 국민이 “괜찮아요. 잘했어요.” 손뼉을 치며 공감하는 시절이 올까.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내년에는 가족이나 지인, 이웃에게 서로 격려와 응원으로 덕담을 주고받는 따뜻한 나라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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