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대통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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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혜 / 수필가

나이 들고 보니 눈뜨고 구덩이에 빠지는 날이 잦아진다.
엊그제 피부과 시술을 받고 병원 셔틀버스에 올랐다. 시외버스 표 파는 정류소까지 기분 좋게 왔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찾으니 감감. 핸드백을 뒤집다시피 잡동사니들을 모조리 꺼냈지만 웬일일까. 어, 보통일이 아니네. 머릿속이 하예진다. 
이걸 어떻게 찾지? 그 큰 대학 병원 어디에 흘렸는지, 아니면 수납 데스크나 피부과 외래 의자에 놓고 깜빡했는지, 못 찾으면 정말 난감한 일인데 어쩌나. 아니 내가 마지막 전화를 어디에서 걸었지? 혼비백산 상태로 우왕좌왕 안절부절이다.
그때 내 또래의 승객이 표를 끊으려 들어왔다가 창구에 직원이 없자 자리에 않는다. 그리고 바나나를 꺼내 내게도 하나 준다. 오늘 혈액검사로 아침을 걸렀으므로 무척 배가 고프던 참이라 무의식적으로 받는다. 그래 이분한테 전화기까지 온통 신세를 지는 거야. 그분이 휴대폰을 꺼내 내 번호를 대라 한다. 순간 가운데 자리 숫자를 까맣게 잊었으니 어쩔거나. 뒷자리만 생각난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번호를 대었다. 신호가 간다. 약국이란다.  아, 살았구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손에 들었지만 펴지 않았다. 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병원을 향해 뛰다시피 걷다가 정신이 들면 심호흡을 하고 또 뛰고, 병원에 다다르자 가슴이 터질듯 아프다. 아까 계산을 했던 데스크 직원이 전화기를 내어 주면서 웃는다.  울상이 되었던 나도 따라 웃는다.
올 4월에 병원 입원 중에 코로나에 감염되어 위중증으로 치닫자 병원에선 일 인실을 내 주며 격리 치료해 주었다. 죽다 겨우 살아났으므로 후유증이 심했다. 백일이 지난 지 언젠데 지금도 밥을 제대로 못 먹고 기침은 가슴을 뒤집는다. 오늘 얼굴의 사마귀인지 포진인지도 다 그 후유증의 하나란다. 힘들게 견뎌왔는데 지금 어디서 뛸 힘이 나왔는지 초인이 되어 휴대폰을 찾고 무사히 귀가했다.
내 삶은 이제 나도 모르게 이렇게 종종 눈 깜빡 할 사이에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 뻔하다. 친한 당숙은 지하철을 타면 아예 자신의 물건에 끈을 매어 손목에 묶는다. 나도 머지않아 휴대폰에 줄을 매어 핸드백에 매야 될 것 같다. 노년엔 지혜로 산다지만 착각이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으리.
주거니 받거니 사는 세상살이, 까맣게 잊혀 있던 기억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그 날 은행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어떤 분의 휴대폰을 주은 일이 있다. 전화기 속에는 신용카드 등등으로 두툼했다. 한 삼십 여분 후 은행 업무를 마치고 창구직원에게 그 전화기를 인계하려는 순간 벨이 울린다. 그렇게 해서 주인에게 바로 돌려 줄 수 있었다.
그때 일이 왜 떠올랐을까. 지금과는 반대되는 현상이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내가 행한 작은 친절이라든가 배려는 그 당시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내가 위급할 때 꼭 되돌려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미친다. 나이 들면서 남에게 받는 친절로 나를 되돌아보게도 된다. 그 언제는 신용카드를 주워 해당 은행에 찾아가 맡기고 며칠 후 당사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 오히려 내가 더 기뻤던 일도  떠올랐다. 이건 분명 유아적인 유치한 방식으로 떠오른 생각이지만 실은 이런 주고받는 작은 일들로 주변은 밝아지리. 
남에게 하는 일이 바로 자신에게 하는 일과 같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살면서 재물 없이도 또는 힘을 쓰지 않고도 마음만 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친절은 하고 많다. 젊어서는 말조차 칭찬보다는 넘겨 집는 난센스로 상대의 속을 뒤집곤 했다. 살다보니 유토피아는 말 한마디 친절로도 얼마든지 존재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 보니 친절이 행복이다.  평범하나 결코 쉽지 않은 진실을 우습게 터득한다. 
오늘 같이 빤히 보이는 구덩이에 발을 헛디딜 일은 점점 많아질 것, 그래도 세상엔 친절이 넘쳐 나는 오늘도 운수 대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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