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
어떤 인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조양임 / 수필가

임인년(壬寅年)도 마지막 달이다. 가을날 뜨락을 물들였던 단풍잎도 지고, 담쟁이의 메마른 줄기는 한 시절 영화榮華의 흔적을 새겨 놓은 듯 회색빛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놓았다. 길섶에 나뒹구는 낙엽을 보며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었던 소녀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고희를 앞두고 지난 시간을 반추하다 어떤 인연 앞에 미소를 짓는다. 
입추가 들던 날, 불현듯 손님이 찾아왔다. 연미색 중절모에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노신사였다. 눈빛이 선한 그는 나를 보더니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정겹게 인사했다. 
“조 여사가 맞지요. 저 안 **입니다.” 
낯선 이의 반가운 인사가 당황스러워 기억을 더듬는데, 번개 치듯 이름이 떠올랐다. 
오래전 일이었다. 모 대학에서 제1회 지도자 과정이 개설되었다. 사회에서 각 분야의 지도자로 역할을 하는 분들이 모였다. 자기소개 시간에 전라도 사투리 억양에 왜소한 몸집인 60대 중반쯤이었던 그는 광주에서 시의원을 지냈다고 했다.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정치 쪽에 관심을 보이는 분이었다. 사회 각처에서 모인 다재다능한 분들과의 소통, 단결, 화합, 최상의 교육으로 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져갔다. 교육이 끝날 무렵에는 원우회까지 발족하였다. 
어느 날 동네 쓰레기 수거장에서 폐지 수집하는 그를 보았다. 처음에는 설마 했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그가 나를 보면 창피하게 생각할 것만 같아 모른 척 지나치려는 순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난처한 나와 달리 그는 주저함 없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폐지를 무엇 하시려고요”
“폐지 수거는 밑천 없는 장사요, 밑에서부터 나를 닦는 일이지요.” 
그의 당당한 자존감에 모른 척하려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무더운 여름 내내 그는 폐지 수거를 멈추지 않았고 지도자 교육에서도 모범을 보였다.
가을학기 중 그는 다음 선거 준비로 고향에 간다고 했다. 반원들은 금일봉을 전했고, 나는 애향심으로 그에게 따로 후원했다. 
올여름 끝자락에서 불현듯 바다 건너온 그. 이십여 년 동안 원우회에서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뜻밖의 방문이었다. 그때 비록 선거는 실패했지만, 항상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했다. 서귀포에 가면 만날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왔노라며 무거운 무등산 수박까지 대동했다. 게다가 내게 돈 봉투까지 건네려고 했다. 선거를 치르며 어려울 때 나의 후원이 그에게는 응원과 힘이 되었단다. 마음의 빚을 덜어달라며 자꾸만 건네는 금일봉을 극구 사양했지만, 팔순 노익장의 진심은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 
내 고향에서도 한 번도 맛볼 수 없었던 광주 특산물인 무등산 수박의 달콤한 맛은 내 고향의 향수를 불러왔다. 더불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안겨주는 기쁨으로 내내 마음이 풍족했다. 
내가 식사라도 접대하려고 해도, 안 선생의 지갑은 종일 분주했다. 선거를 치르다 보니 세상인심을 누구보다 많이 배웠노라며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아이처럼 맑아 보였다. 여전히 고향에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는 그에게서 노익장의 힘을 느꼈다. 잎을 떨군 앙상한 겨울나무처럼 보이지만 석양을 등지고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은 풍성해 보였다.
지구라는 행성에 여정을 풀고 머무는 시간 동안 만난 사람들. 옷깃 스치듯 지나간 사람들조차 다 그분의 뜻에 따라 정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남지 않은 사람도, 얼굴을 붉혔던 이들도, 함께 웃고 울었던 만남도 모두 다. 그들과 함께 그린 나의 지난 시간이 저 담쟁이가 그려놓은 벽화처럼 어딘가 새겨지고 있을 터. 올해를 잘 마무리하고 내년에는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겨 보리라. 그 어떤 인연과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쥬벨 2022-12-29 22:54:12
소중한 인연에 감사하고 삶의 묘미를 즐길줄 아시는 수필가님께 감동받아서 감사함으로 몇자 표현합니다.
엄동설한에 몸과 마음이 얼어있었는데 훈훈한글 읽고 있노라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난답니다.
따뜻한글 잘 읽고 갑니다^^

은파 2022-12-29 22:46:18
함박눈 쏟아지는 겨울. 지리산 선녀계곡의 얼음 밑으로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듯 머리속이 상쾌해지는 글입니다. 누룽지 같이 구수한 맛깔나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