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聖誕), 죽지 않는 이의 위대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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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완,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성탄, 세상을 구원한 이의 거룩한 탄생을 기념하는 때다. 매서운 추위를 녹일 따뜻한 정(情)을 나누는 손길이 분주한 때이기도 하다. 늘 이맘때면 차가운 날씨와는 달리 마음이 푸근해지는 이유다. 언제부턴가 예전만큼 거리 곳곳에서 캐럴이 울려 퍼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저작권법 시행과 소음 민원 발생 등과 같은 해묵은 이유에다 3년을 지나고 있는 팬데믹이 영향을 끼친 탓이란다.

“캐럴이 사라진 거리에 ‘AI 창작곡’ 나온다.”라는 최근 뉴스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문제는 경제야!”라던 미국 대선주자의 선거 구호에서부터, “속도가 문제이지 방향성은 제대로”라던 팬데믹 초기의 ‘비접촉(untact)-온라인 접촉(ontact)’ 옹호론을 거쳐, 다문화를 넘어선 비인간-인간의 혼종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민거리를 반영하고 있어서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는 돈과 과학기술이 성탄의 기적보다 우선이 되는 세상인듯해서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성탄’은 탄생한 이가 누구인가를 묻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으레 그가 “세상을 구원한 이”라고 믿고, 그렇게 고백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성탄이라고 부르는 이유로 부족하다. 세상을 구원한 이는 이미 세상을 창조한 이로서 우리 곁에 늘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탄생’이어서가 아니라, ‘유한한 인간의 탄생’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 신학에서는 육화(肉化)라고 한다.

육화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려고 불멸의 존재가 택한 방법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보다는 인간으로서의 탄생이 더 위대한 선택이다. 불멸의 존재가 필멸의 존재로 되기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가 신(神)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과 관련된 다양한 논란이 제기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이기만 한다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주는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축복받는 탄생이 정반대로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신비다. 그런데 이러한 신비는 도덕경 4장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길이란 텅 비어 있으므로 쓰더라도 채울 수 없다. 깊구나! 마치 모든 것 가운데 으뜸인 듯하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꼬인 것을 풀게 하고, 빛나는 것을 부드럽게 하고, 먼지가 쌓이는 것을 함께한다. 빠져드는구나! 마치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지만, 조물주를 앞선 이를 닮았구나.”

노자가 말하는 길, 곧 도(道)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다. 태어나 지금까지 열심히 채우고 있지만, 생명이 다하는 때까지 채울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것보다도 깊다. 이 길을 잘 걸으면 날 선 마음이 무뎌지고, 꼬인 마음이 풀어진다. 눈이 시리게 빛나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먼지라고 하더라도 함께 뒤집어쓸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각자가 찾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듯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게 죄’라면서도 애써가며 살아갈 뿐 아니라, 끝내지 않고 계속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이유다. 그리고 구세주의 탄생만이 아니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모든 탄생이 거룩하고, 축복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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