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과 함께 떠난 독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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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운 시인/수필가

“선생님, 헛개나무 열매 좀 드릴까요?”
“그 귀한 헛개나무 열매를 어떻게 구하셨어요?”
“우리 밭 공터에 심었던 헛개나무에서 너무 많은 열매가 맺혀서 처치 곤란입니다. 또 요즘이 환절기인데 제가 수십여 종의 약초를 넣어서 제조한 기침, 천식약도 조금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50여명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을 나들이, 즉 가을 소풍을 나서는 날이다. 두 대의 버스에 10여명의 봉사단원들과 함께 10시 미사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나는 본의 아니게 어르신 대학(시니어 아카데미)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코로나 발생 전에는 9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나, 3년 새에 귀천하신 분, 와병 중이신 분등이 많이 생겨서 지금은 50여명이 출석하고 계시다. 매주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미사, 건강 강의, 그룹 활동, 점심 식사 등의 순서로 하루 종일 진행된다.
옆 좌석에 합석한 어르신은 80여년의 역사를 풀어내기에 바쁘다. 젊은 시절 이북에서 홀로 온 건실한 수의사 청년을 만나 결혼하고 미용실을 경영하면서 세 자녀를 키웠다. 모두가 크게 성공하여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넓은 농장과 큰 빌딩을 갖고 있어서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짧은 시간에 책 한권을 독파한 느낌이다. 어르신은 아주 작은 자투리 시간만 있어도 묵주 기도를 바치는데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아니 성스럽다.
처음 방문지는 한림성당이다. 가는 길엔 함께 로사리오기도를 합송하면서 갔다. 대부분 80여세의 어르신들인데 목소리가 우렁차다. 여러 기도문을 정확하게 외우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 천상의 합창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림성당은 유서 깊은 성당으로 64년간 한림에서 사목한 임피제 신부님 주도로 1955년 세워진 건물이다. 도로 확장 때문에 1999년 구건물이 철거되고 종탑만 보존되어 있다. 이 옛 한림성당 종탑이 제주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제주의 고유재료인 현무암을 활용해 축조되었고, 탑의 외벽과 건축양식이  종교적 의미를 담은 종탑 특유의 조형적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새로 지은 성당도 2002년 북제주군 건축상을 수상한 작지만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점심 후에 방문한 곳은 라온더마파크이었다. 마상 공연은 고구려의 탄생을 주제로 한 50여명의 가마병들의 전투 경연으로 이루어졌는데 말과 장수들이 활을 맞아 전사하면 함께 바닥에 누워 움직이지 않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혼돈의 시대, 영웅의 탄생, 운명의 갈림길, 운명의 결투와 위대한 영웅의 탄생의 4부로 진행되었다. 나래이션이 있기 때문에 재미와 스토리를 모두 즐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용수 성지(聖地)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8월 중국 상해 김가향(金家香, 진쟈샹)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그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던 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여, 고국에서 감격의 첫 미사를 올린 곳이다. 
용수성지에는 김가향(金家香) 성당을 본 뜬 기념성당과 기념관, 김대건 신부가 타고 온 범선(라파엘호) 등을 볼 수 있다. 성 김대건 신부(1821~1846)는 충청남도 당진(솔뫼 성지) 출생으로, 1845년 한국인 최초로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사목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었다. 1846년 9월, 25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다. 
기념관 1층 형구 전시실에는 족쇄, 태형대, 주장, 황쇠, 사형모 등의 형구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옥중 편지도 있는데, 이 편지의 마지막 구절 "부디 서러워 말고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영원히 천주 대전에서 만나길 바란다, 잘 있거라!"라는 문구는 우리에게 진한 감동과 애련함을 가져다주었다. 
어르신들을 인솔하면서 혹시나 다치거나, 걷지 못하거나, 길을 잃으시면 어찌하나 노파심이 많았다. 그러나 봉사자들 보다 항상 먼저 차에 자리를 잡으시고 숨겨 싸오신 간식거리를 내미시는 따뜻함에 나에게는 오히려 배움이 많았던 나들이였다. 우리가 어르신으로부터 받고 배우는 것은 오직 그 분들의 정성과 사랑뿐이라는 생각이 촉촉이 스며들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이 세상을 떠나시면 도서관 한 채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어르신들과 나들이 하면서 깊고 두툼한 50여권의 책들과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르신과의 시간은 살아 움직이는 책과의 흥미로운 독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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