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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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선 / 수필가

저지리 김창열 미술관에 갔다. 제3회 제주비엔날레행사가 열리고 있어서 참관하였다. 몇 년 전에 개관할 때 갔다 온 이후 오랜만이다. 미술관 입구의 모습은 영화 스튜디오가 지어져 있어 색다르다. 2021년, 김창열 화백은 영화감독이자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차남 김오안 감독이 있어 편안히 눈 감았으리라.

물방울은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그린다고 화백은 말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 맹산에서 피난민 대열에 홀로 내려왔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격문을 썼다가 붙잡혔다. 처형당할 위기에서 적에게 들키지 않으려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숨어지내며 탈출했다. 미아리고개를 건너며 나뒹구는 죽음을 보았다. 중학교 친구 반 이상이 한국전쟁에 잃은 충격으로 침묵은 시작되었다.

고향의 물 좋은 강가에서 수영하고 할아버지로부터 유교식 천자문을 배운 일은 평생 화선지 바닥에 깔린다. 천자문은 하늘이고 물방울은 땅을 나타내었을까. 오십여 년 동안 꽃을 그리거나 나체를 그려본 일없이 일념으로 나가기도 어렵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부모의 산소에서 종일 울었던 슬픔이 추상적인 물방울이다.

나는 칠팔 년 전에 LA에서 전달문 선생님을 만난 일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찾아가는 문인을 만나면 물방울 그림이 식당 벽면 가득 채워진 곳으로 안내했다. 같은 피난의 대열에 끼었던 일이 생각나고 초기 작품활동 할 때 옆에서 많이 격려해 준 일이 있나 보다.

“고 선생, 물방울 화가 들어 보셨나요? 뉴욕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LA로 왔죠. 말이 없고 초창기에 그렸던 신문지 물방울 그림을 모르오?”

제1전시실에 들어섰다. 색이 바랜 신문지 그림 넉 점이 이웃하였다. 촉촉이 젖은듯하여 내 손은 그림 앞으로 다가가며 닦아주려 하였다. 말로만 들었던 신문지 그림이다. 신문은 매일 읽어야 하는 실지 삶이었고 닦으려 했던 물방울은 환영(幻影)이었다. 그는 노자의 도덕경 중에서도 무위(無爲)를 심오하게 새겼다. 자연이 하나 됨도 수증기가 구름이 되고 모여지며 이슬비나 소나기가 된다. 때에 따라 많은 양의 비는 땅으로 스며들어 식수가 되고 일상이 하나가 되었다. 김창열 화백이야말로 오로지 물방울로 대화하고 사라짐을 직감했던 대가다.

시선이라는 주제 아래 <순진한 물방울>, <유교적 물방울>, <극사실주의 물방울>, <침입하는 물방울>이 걸려있다. 영롱한 물방울이었다가 수천수만 개의 자유자재한 물방울은 우리 삶이었다. 물 없이는 살 수 없고 방울 하나하나는 집처럼 마을을 이루고 있다. <떨리는 물방울> 앞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이 살아 움직인다. 가느다랗게 실처럼 숫자 ‘8’은 연속으로 구불거린다. 낙하하려는 장면을 있는 힘 다해 화폭에 담았다. 머리카락 같은 떨림이 그려 있다. 형태를 잃어갈 듯 늘어지는 물방울은 그림자까지 붙들고 있다.

한 줄로 작은 물방울이 베이지색 전지 가운데 섰다. 마치 참새가 전깃줄에 매달려 있듯 언젠가는 날아가고 사라질 것이다. 화백은 지수화풍에 의해 생겨나고 없어짐도 물방울만 그리며 침묵 속에 명상한다. 침묵에 빠지며 달마를 좋아했다. 달마대사는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죽인 혜가를 제자로 받아주지 않은 일화가 있다. 간청의 뜻으로 혜가가 손목을 자른 일은 내 안의 나를 버린 것이다. 화백은 벽을 마주하여 앉아 완고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침묵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김오안 감독은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물방울 너머의 세계를 영화 폭에 담았다. 아버지 또한, 불어로 얘기하며 손자와 가위바위보를 하고 수영장에서 배영을 즐기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물방울이 모여 강물이 되었고 풍차 돌리듯 팔을 돌리며 유유히 떠 있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다. 전달하려는 아버지의 인생과 예술을 자신만의 시점으로 드러냈다.

엎어놓은 그림 하나에서 물 자국을 발견하고 그 뒷면의 물방울에 심취하여 침묵으로 그려온 인생이었다. 물로 돌아간 삶 속에서도 물방울은 화가의 침묵이 되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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