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의 어머니를 안아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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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제주장수복지연구원장/ 논설위원

새벽 5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거실로 나오자 어머니도 따라 나오셨다. 한 방에서 같이 잔 지 10년이다. 어느날 밤, 베개를 안고 우리 방으로 오신 어머니는,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흉몽에 시달리셨는지, ‘무서워서 혼자 잘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룸메이트가 되었다. 3월이 오면 만 백세가 되신다. 100세는 최상의 수명이라 여겨, ‘상수(上壽)’라 부른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그대로, 올해도 성춘(成春) 하시기를 기원해 본다.

새해 들어 이웃들이 동일한 내용의 카톡을 보내 왔다.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22년 1월말 기준, 제주 인구는 66만3526명이다. 이중에서 90세는 1만6019명, 92세 9969명, 94세 5117명, 96세 2602명, 98세 1071명, 99세 648명이다. 연령별 생존확률은 70세 86%, 80세 30%, 90세 5%로, 90세가 되면 100명 중 5명만이 생존한다. 이 조사를 함께 한 국민연금공단과 건강보험공단이 제시한 바, 우리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평균 나이는 ‘76세~78세’다.

사실 제주도는 ‘장수의 섬’으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2022년 12월말 현재 전국적으로 100세 이상 인구는 6472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12명에 해당한다. 100세 이상 인구를 공식적으로 집계하기 시작한 1990년도 459명보다 약 14배가 증가한 수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인구 구조가 변했다. 제주도의 100세 이상 인구는 231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34명이 백 살을 넘기고 있다. 왕년의 1위 자리는 의료시설이 탁월한 서울·경기에 넘겨줬지만, 여전히 제주도는 장수를 선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쯤에서 새삼 주목하게 되는 것은, 100세 이상 231명 중 남자는 9명, 여자는 222명, 여성 비율이 96%란 사실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서 그런지, 유독 이 부분에 눈길이 간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0년이다. 이따금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디 갔냐’고 물을 때는 가슴이 서늘해 온다. 2남7녀의 후손들이 모여서 80여 명의 떼를 이루었지만,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드리진 못한다.

아버지가 못내 그리운 구정 연휴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을 읽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인생 수업’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이다. 저자인 에디 제이쿠는 나치를 피해 숨어 사는 다락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지냈던 시간을, ‘내 생애 최고의 시절’이라 회고한다. 비좁고 불편하고 뼈 빠지게 일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살았지만, ‘어머니의 웃는 모습을 보면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하였노라’고. 어머니가 나치에 살해당한 이후로는, 어머니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그러니 독자들이여, 지금 당장 집으로 가서 ‘어머니를 안아드리라’고.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어머니를 안아드린 기억이 희미하다. ‘아침을 먹어시난 무신 일이라도 해사주’라며 방을 나가시는 어머니. 영락없는 제주 여인이다. 혹여 마당에 나가 잔디를 뽑으실까 봐, 얼른 뒤따라 간다. 손을 붙잡고 대문 밖으로 나가, 바다가 보이는 의자에 앉혀 드린다. 해국처럼 수줍게 웃으신다. 당신의 인생을 꽃피웠던 해녀시절이 떠오르는 걸까? 어머니를 가만히 안아본다. 아기처럼 작아지셨다. 육신이 닳도록 거친 세월을 살아내신 게다. 아,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이, 당신의 어머니를 안아드려라. 아버지도. ‘지는 해가 더 붉다’지 않는가.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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