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탄압·수탈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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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항일 종교인 정구룡
정경룡, 의술 조예 깊었던 한학자…서당서 인재 양성
정계장, 조선 후기 문신…장령·제주목사 등 지내
정관휘, 제주목사 등 역임…표류 외국인 돌려 보내
정교, 구한 말 애국 계몽운동가…독립협회 간부 활동
정구룡, 법정사 항일운동 격문 작성…건국훈장 애족장
정기원, 조선 철종 대 제주목사…세율 바로 잡아 개정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하나다. 사진은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 사진=제주특별자치도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하나다. 사진은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정경룡 鄭慶龍1780(정조4)~1854(철종5), 한학자, 자는 보천(保天), 호는 운암(雲庵). 성산읍 고성리동암류에서 생장.

종손인데다 또 독자였고 가정에는 위로 3대가 함께 살고 있어서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하지 못함을 한탄, 평생 서당 글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 육지에서 들어와 사는 조묵와(曺黙窩·이름 미상)에게 도학을 배워 진전(眞詮)을 터득하는 한편 의술에 조예가 깊었다.

한 고을의 추중을 받았으나 경술국치를 당해 그 학문이 쓰여 지지 못하였다. 지금도 많은 그의 제자가 활동하고 있다. 1854년 타계(他界)해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회장(會葬)한 자가 800여 명이었다. 성품이 원만하고 지방의 모든 일에 앞장서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에 우물을 파고 학교를 세우고 정의향교를 오경언(吳卿彦)과 중수했다.

정계장 鄭啓章1663(현종4)~1728(영조4), 문신. 제주목사. 자는 명중(明仲), 본관은 초계, 정규(鄭揆)의 아들로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1696(숙종22) 정시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벼슬은 장령과 제주목사를 역임했다. 1727(영조3) 10, 한범석(韓範錫)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286, 혹자가 공자의 신주를 훔쳐서 옥동(獄洞)의 폐려(廢閭)에 옮겨 놓음에 따라 이를 예조에 보고, 이로 파직되고 동년 7월 사망.

그리고 예조의 지시에 의해서 공자의 구신주(舊神主)는 묻어버리고 새로운 신주를 모시러 조정에 올려 보낸 바가 있었다.

1728년 정의현 유생 오흥태(吳興泰)가 창의군을 일으켜 도해하려 했으나 반적(叛賊)의 괴수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이 처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창의병을 해산시켰다.

정관휘 鄭觀輝생몰년 미상, 무신. 제주목사. 1799(정조23) 12, 임시철(林蓍喆)의 후임으로 제수되고 1802(순조2) 3월에 전출되었다. 1801, 이국인 5명이 본도에 표류해 왔다. 여송인(呂宋人·필리핀 사람)이거나 막가외인(莫可外人·마카오 사람)으로 보인다.

이 해에 목민관인 그는 표류인들을 육로로 연경에 보내었다. 정관휘鄭觀輝가 지은 열락재기(悅樂齋記)’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전라도 만경현감으로 재임한 바 있었다. 재임 중인 1801년 송우암 적려유허비각(謫廬遺墟碑閣)을 건립하고 동년 시노비안(寺奴婢案)을 혁파했다. 또 이 해에 공마의 가납(嘉納)을 특별히 감면하는 조치를 내렸다.

앞서 갑인년(1794) 대흉년 이래 공마가 줄어 없어진 것이 3000여 두나 되므로 1500두는 목졸로 부터 징발하니 원성을 들었다.

이에 정의현 사람 강성익(康聖翊)은 사헌부 지평(持平)으로서 부름을 받아 입궐하니, 간절히 소청을 논해서 그로 말미암아 임금이 가납해 이를 특별히 면제했다. ‘열락재란 정조 때에 대정현 성안에 설립된 서당의 이름이다.

정교 鄭喬1856(철종7)~1925(일제강점기), 문신. 학자, 제주군수. 애국 계몽운동가. 호는 추인(秋人). 서울 출신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관직을 사임, 1905109일 이중익(李重翼)의 후임, 제주군수로 임명됐으나 끝내 사양해 이듬해 115일 의원면직, 그래서 조정에서는 김중배(金重培)를 임명.

1896년 독립협회가 창설되자 이에 가입했다. 서기·제의 등의 간부직을 지냈다.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고영근(高永根), 이승만(李承晩) 등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1898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해 정부의 시정개혁을 요구하고 자주 독립과 호헌(護憲) 및 민권을 주장했다. 1910년 일제의 국권 침탈 이후 전라북도 이리에 은거했다.

1894(고종31) 수원판관과 황해도 장연군수 등을 지냈다. 사변 후 관료들이 그 주모자 색출과 처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임최수(林最洙), 이세진(李世鎭)이 의병을 일으켜 관료 암살 계획을 세우고 친구인 그에게 자문을 청했다.

이들에게 친위대 안의 군인들과 제휴해 거사할 것을 권하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말고 신중히 처신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자신은 일본의 침략적 행위에 대해 무력으로 항쟁하는 방법보다 실력 양성의 방법을 택할 것을 결심했다.

아관파천 이후 정부가 러시아 등에 대한 외세에 의존하고 삼림·광산·철도 등 국가의 중요한 이권을 외국인에게 넘겨줬다. 웅변에 능하고 글을 잘 지어 항상 정부를 탄핵하는 상소문의 기초위원이 됐으며 정부에서는 회유책으로 중추원의관·시종원시종에 임명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독립협회 간부로 정부의 폐정 개혁을 직언했다.

정부를 지지하는 황국협회(皇國協會)와 충돌하였을 때 독립협회 간부 17명과 함께 검거되고 독립협회는 해산을 당했으며 이때 태() 40에 처해졌으나 이에 불복, 상소해 무죄로 석방됐다. 또 독립협회 대표위원인 그는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부산 영도) 조차(租借) 반대의 문제로, 러시아와의 불화를 초래하게 했다는 이유로 체포하려고 하자 이를 미리 탐지해 지하로 숨어버렸다. 그 뒤 아펜젤러(Appenzeller, H. G.)의 보호로 배재학당으로 피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 귀가했다.

정구룡 鄭九龍1898(광무2)~?,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운동. 승려. 일명 정구용(鄭九鎔), 경북 영일군 사람, 법정사 항일운동의 격문 작성자. 경상북도 영일(迎日)군 창주(凔洲)면에서 건너와 중문면 법정사(法井寺)에서 동향의 주지 스님 김연일(金蓮日)과 연계돼 일본의 침략에 대해 분노했다.

반일(反日반외세(反外勢)에 의한 도덕적인 이상국가를 실현할 의지로 활동했다

그는 19192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상고해 19236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6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정기원(鄭岐源) 거사비(去思碑) 제주목 관아지 구내.
정기원(鄭岐源) 거사비(去思碑) 제주목 관아지 구내.

정기원 鄭岐源1809(순조9)~?, 무신. 제주목사. 자는 봉수(鳳叟), 본관은 연일, 태락(台樂)의 아들이다. 1859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듬해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 1870년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역임했다. 이듬해 진무사로 강화(江華)에 부임하여 강화 손돌-에 침입한 미군(美軍) 함대의 불법에 항의, 통상교섭을 거절했다. 시호는 장숙(莊肅).

1863(철종14) 1, 임헌대(任憲大)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8643월에 사직을 하고 떠났다.

제주목 관아지에 사상정공기원거사비가 전해진다. 목사정공기원선정비가 서김녕리 비석거리에 세워져 있다. 세율을 바로잡아 개정하고 평역미(平役米)를 감면해 금전으로 정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로서 덕을 기려 도민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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