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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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4·3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폭도 새끼라는 말 들으면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알기나 해요? 고향에서도 못 살고… 이젠 다 필요 없어요!”

사람들이 폭도라고 했던 그의 아버지는 5개 국어를 할 정도로 유식했지만 허약하고 평생 무능했다. 늘 병원 신세를 졌고 약병을 달고 살았다. 집안일이며 밭일은 모두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가 불쌍했다. 아버지가 미웠다. ‘폭도’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나쁜 짓 한 사람인 것 같아 아버지 말도 듣지 않았다.

사촌 형제들도 그의 아버지를 원망했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육군사관학교 진학과 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사촌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 때문에 불합격했다고 했다. 사촌에 이어 친척들도 그의 집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경찰은 수시로 아버지를 찾아왔고 그가 다니는 학교까지 찾아왔다. 그는 교무실로 불려가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고 있다고 대답해야 했다. 말할 수 없는 위압감에 짓눌렸고 그는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무렵 가출을 단행하고 도망치듯 무작정 서울로 갔다.

동네사람들이 폭도라고 했던 아버지는 나이 예순일곱에 세상을 등졌다. 생전에 아버지가 왜 폭도였는지를 그도 묻지 않았지만 아버지도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갔다. 그와 세상의 벽은 점점 높아만 갔다.

지난해 여름, 리사무소에 동네사람들이 모인다고 했다. 그도 갔다. 아버지를 폭도라고 했던 동네 사람들도 서른 명도 넘게 왔다. 4·3도민연대 대표는 “그 시절 유죄판결 받은 피해자는 다시 재판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재판은 법적으로 절차를 지키지 않은 재판이어서 다시 재판을 청구할 권리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모임을 주선하신 동네 어른에게 물었다. 그의 집안 내력을 아는 동네어른은 ‘저 양반 말이 맞다. 그러니 나중에 4·3도민연대 사무실로 가면 잘 도와 줄 거다’라고 했다.

그분의 말씀을 따라 4·3재심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아버지는 4·3피해자이며 군법회의에 의한 희생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일본 동경대학에 유학 중 해방이 되자 어서 귀국하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고향집 ‘애월면 물메’로 돌아왔고 얼마 후 4·3으로 군인들이 아버지를 잡아갔다. 결국 군법회의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 갇혀 7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집에 오셨던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가 막혔다. 평생 약봉지를 달고 살았던 아버지, 주변의 질시와 냉대를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던 아버지, 부당한 국가 권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아버지를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어쩌랴,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린 형량 15년을 선고한 4·3군법회의 재판은 계엄법도 없이 자행한 불법적인 재판이었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해서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에 제출한 재심청구서는 해를 넘기고 있다. 하루빨리 재심 재판이 진행되어 아버지 산소에 ‘무죄 판결문’을 올려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날은 아버지와 그가 화해하는 날이 될 것이고 아버지와 그가 세상과도 화해하는 날일 것이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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