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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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며칠 전, 오랜만의 만남이 있었다. 30년을 이웃사촌으로 지냈던 분과의 해후에 만감이 교차했다. 취락 구조, 읍내 동산에 집을 지어 새 동네를 이룸에 한 축 끼었다. 낯설었지만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다. 버스로 시내와 20분 거리라 교통도 불편하지 않았다. 팍팍한 도시에서 한발 물러나 한적한 시골에서 살자던 내 취향에 딱히 맞아떨어졌다.

그곳서 좋은 인연을 만났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소방도로 하나 건넛집 K. 읍사무소 일용직 공무원인 그는 천성이 온후하고 순직한 사람이었다. 해방둥이로 세 살 연하인 그와 어느새 절친이 돼갔다. 술을 좋아해 간간이 집을 오가며 정을 섞어 도타운 사이로 허물없이 지냈다. 1만 평 감귤을 재배하는 독농이자 부농이었다.

가끔 아이들 교육에 관해 몇 마디 조언해준 게 고작인데도 그걸 고마워할 정도로 그는 나를 따랐고, 나도 어느새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철이 되면 귤을 컨테이너로 담아 왔다. 그게 비상품일지언정 오지랖이 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베풂이었다. 나는 귤과는 연이 닿질 않아 마당에 유자나무 한 그루가 고작이었다. 그 동네에 오랜 세월을 살면서 연년이 그가 갖다주는 귤을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했다. 더욱이 책상머리에서 몇 줄 끄적일 때 주전부리로 줄곧 먹는 귤이다. 지나고 나서야 염치없음에 부끄러워 낯이 안 선다.

그는 내게 형제보다 더한 우애를 쏟았던 사람이다. 어느 해던가. 친가와 처가 선산 18기 벌초를 어쩌다 나 혼자 하던 날이다. 낌새를 눈치챈 그들 부부가 낫을 들고 달려와 익숙한 손으로 풀을 베 주던 일이 기억 속에 되살아난다. 사람 좋다고 다 되는 일인가.

그의 부인이 워낙 손이 커 이런저런 음식 대접도 후하게 받았다. 해산물에서 산나물, 메밀범벅, 꿩고기(동생이 엽사)에 이르기까지. 타고난 걸까, 정을 섞으면 손도 타게 마련인가. 드물게 음식 맛도 좋았다. 아내와 ‘언니 동생’ 하며 지냈다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음식을 그릇째 들어 드나들었고, 나는 극진히 대접을 받았다.

남편 K가 폐렴으로 몇 달을 앓다 애석하게 세상을 등졌다. 단명해 환갑에 채 미치지 못한 생애였다. 그가 숨지기 전 입원했을 때, 우리 부부는 예닐곱 차례 문병했다. 좋아하던 영양탕이며 생선 덮밥, 심지어 붕어빵까지 들고 가 위로했지만 허사였다. 체념해 아무 말 없이 먹으며 쓸쓸히 웃던 표정이 눈앞으로 떠오른다.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선한 사람이 명이 짧다는 말을 곱씹던 생각이 난다. 장례엔 장지에 가 지켜본 뒤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나들며 그의 집을 기웃거리곤 했다.

몇 년 후, 우리가 시내로 이사하게 됐다. 그의 부인, 게발선인장 큰 화분을 이삿짐에 실어 보내며 우리와의 이별을 몹시 아쉬워했다. 무학으로 시골에서 밭일하며 살아온 부인, 번화한 신시가지 아파트를 찾아오기는 힘들다.

그 동네를 떠나온 지 3년째, 간간이 전화가 있었을 뿐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 옆집에서 우리를 찾아온다는 얘기를 듣고 따라온 게 아닌가. “예, 이거, 선생님 좋아하는 모물 범벅하고 귤이우다.”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나눌 새도 없이 갖고 온 짐부터 끌러 놓는 부인. 메밀 범벅을 담은 냄비 크기가 솥만한데, 거기다 탐스러운 레드향.

잊지 못할 이웃사촌과 지난 얘기를 나누노라 해 기우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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