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꽃이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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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허자, 광주대각사 주지·제주퇴허자명상원장

수류화개(水流花開)라는 말이 있다. 입춘이 지나면서 이곳 제주에는 여기저기 봄기운이 돋아나고 있다. 특히 이즈음에 피어나는 수선화, 돔박꽃(동백꽃)이 봄의 전령처럼 봄소식을 전한다. 세상이야 어떻게 변하든 계절은 돌고 도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봄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봄은 겨울에서 오는 것 같다. 낭구(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겨우내 강추위를 무릅쓰고 가지마다 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겨울에 만들어진 이 움들이 봄이 되면 새싹을 틔우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행복도 어렵고 아픈 시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고생 끝에 낙’이란 말처럼 뼈아프고 힘든 고난 끝에 찾아오는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배고파 보지 못한 사람들은 가난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 알 턱이 없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50·60·70년대의 보릿고개를 경험한 바 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처절한 가난을 겪었었다. 나는 서울 미아리 비가 새는 판자촌에서 방안의 세숫대야에 ‘쫑알쫑알’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당시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철이 없어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빗방울 소리가 바로 가난을 알려주는 ‘흥부의 교향곡(?)’이 아녔을까.

사람은 성장기가 중요하다. 성장기에 겪는 체험은 오래도록 그 사람의 소중한 인생의 ‘나침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따라간 서울의 미아리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흥부촌이었다. 서울 인구가 100만도 채 되지 않던 미아리에는 미군부대가 있었고 시골에서 상경한 시골농부 아버지는 그래도 판자집에서 미군부대 식당을 다니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온 건빵과 껌, 비스킷은 내가 학교에 가서 동무들 앞에서 뽐낼 수 있는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잊지 못할 추억 가운데 ‘오징어스토리’가 있다. 학교 앞에서 우리의 군침을 돌게 했던 ‘구운 오징어’는 당시 우리들에게 최고의 인기였다. 그 오징어를 사먹다가 선생님께 들켰는데 선생님은 오징어를 입에 문채 복도에서 나를 손들고 서있게 하는 벌을 내렸다. 지금 같다면 당장 입에 넣고 씹어 먹을 텐데 얼마나 순진무구했던지 선생님의 지시한대로 그 오징어를 입에 물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벌을 섰었다. 당시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은 하늘의 명령이었다.

제주 명상원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수선화를 바라보면서 문득 그 옛날 추억이 새롭다. 내 추억 속에는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할머님의 사랑과 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이 주렁주렁 매달려 풍성하다. 역시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말은 진리인가보다.

가난은 자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울 일도 아니다. 오히려 가난 속에서 사람도 돈도 귀함을 알게 됐으니 가난은 때로 ‘스승’이 될 수 있다. 가난은 조금 불편한 것일 뿐 불행은 아니다는 것을 훗날 깨달았다. 지금도 가난한 사람을 보면 애잔한 생각이 먼저 앞선다. 이 마음 때문에 한 때 장애인복지시설 ‘호산(虎山)마을’을 운영했지 않았을까 한다. 가난은 나누면 줄어들고 ‘나누지 않음’이 바로 ‘가난’이라는 것을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삶속에서 깊이 새겼었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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