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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봉, 수필가·시인

겨울의 끝을 잡은 달,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곧게 뻗은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자동차, 한적한 인도엔 체구 작은 할머니가 뭔가를 짊어지고 지나간다. 무거운지 손이 어깨를 누르는 끈을 잡고 자꾸 들썩인다. 저 고통은 등짐을 져본 사람만 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예닐곱 살부터 시작된 아기업개로 줄줄이 2년 터울로 태어나는 여섯 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다. 아기를 업고 어머니 따라 밭으로 간다. 어깨를 빠갤 것 같은 짓누름,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다. 돌멩이를 피해 가며 비포장도로를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어머니가 동생을 업으면 짐을 져야 했다. 현장에서 급조한 칡넝쿨로 만들어진 끈은 어깨를 반으로 갈라놓을 것같이 파고든다. 아픈 어깨를 위해 손을 넣으면 손가락이 끊어질 듯 아팠다. 여덟 식구의 먹을 걸 끓이기 위한 땔감이나 곡물 바심한 것을 꼬맹이라 해도 짊어져야 했던 시절이다. 어려서 짐의 소중함이나 값어치는 모른다. 힘에 겨워서 원망하며 걸었다. 화풀이한답시고 돌멩이를 걷어찼다간 아픔만 더 얹어진다. 얇은 검정 고무신이 발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땔감은 산더미처럼 쌓아놔도 얼마 가질 못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이면 아버지 따라 들에 나가 땔감을 구해야 했다. 소나무밭 주인의 눈을 피해 삭정이를 모아야 했다. 먹고 살아야 할 이유가 커서 그런 서리 비슷한 잘못은 눈감아 주던 시절이다.

동생들 돌보기, 물지게로 우물물 길어 져 오기, 땔감 구해야 하는 일은 커가면서 자연스레 내 일이 되었다. 모두 어깨를 짓누르는 일들이다. 일곱 살부터 저녁밥을 지으면서 땔감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부엌 한 벽을 높다랗게 차지했던 게 높이를 낮춰 가면 불안했다. 먹어야 살기에 보리쌀이 있어도 땔감이 없으면 무용지물임을 알게 된 것이다.

4학년이 되었을 때 철물상을 하는 고모님 덕분에 자그마한 손수레가 생겼다. 지금은 빈 몸으로 걸어 오르기도 힘겨운 가파른 동산을 웃으면서 끌고 올랐다. 겨울이면 헉헉거릴 때마다 마차를 끄는 말의 콧구멍에서 나오던 그런 흰 김을 내뿜었지만 더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어깨의 자유가 신났다. 어깨를 누르던 끈은 손수레에 실린 짐을 묶고 달렸다. 빈 수레로 산으로 갈 때는 동생을 태우고 신나게 달렸다.

손수레가 마차로 마차는 경운기로 경운기는 트럭으로 바뀌면서 나이도 스물을 넘겼다. 물질적 어깨의 짐은 덜어냈지만, 어린 나이에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던 10대는 추억 속에 저장되었다.

동네에서 가장 빠른 부엌 혁명을 받아들였다. 연탄, 석유풍로, 연탄보일러를 시작으로 LPG 가스와 기름보일러로의 변환은 짧은 세월에 이루어졌다. 어깨를 아프게 했던 기억이 받아들인 선물이다.

결혼과 더불어 자그마한 사업을 하면서 자동차 다섯 대를 사용했다. 트럭, 벤, 승합, 승용. 회사 휴가 날엔 바닷가에 줄지어 세워 캠핑카 대용으로 사용했다. 풍요는 누렸지만, 사장이라는 마음의 짐은 더 무거웠다.

환갑을 넘긴 지 어제 같은데 어르신이라 불린다. 지금도 뭔 짐을 짊어졌는지 어깨가 묵직하다. 내려놓을 시기가 되었건만 마음속에 욕심이 들었는지 내려놓지 못하는 짐이 많다. 그중에 자식들이 그렇다. 제 인생 제 스스로 잘 알아서 살아가련만 지레 만들며 걱정하고 있는 내 안의 짐.

저 노인의 무거운 어깨도 가벼워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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