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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선 / 수필가

지나치게 추운 날씨 탓일까. 올해 들어 벌써 여러 차례의 부음을 접했다. 음력 12월은 내 생일이 들어있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떠난 달이기도 하다. 벌써 삼십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버지의 빈 자리는 여전히 낯설다.

아흔이 넘는 아버지와의 이별에 마음 아파하는 지인을 어떻게 위로할까 전전긍긍하다가 슬픈 소식을 들어서 나도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오일장에서 또 양파를 샀다. 양파망에 가득 담아 보기 좋게 쌓아놓은 곳을 지나 조그만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 좌판 위에 올려놓고 파는 할머니 장터에서. 할머니들은 양파를 비닐봉지에 담아주며 냉이와 달래를 사 가라고 권했다. 지금 사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마법을 걸었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채소 서너 가지가 든 비닐봉지가 어김없이 손에 들려 있곤 했다.

양파를 썰다가 울었다. 코끝이 찡하다가 눈이 매워지면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나왔는지 모를 슬픔으로 가슴까지 먹먹해졌다. 오래된 기억이기는 하지만 아버지는 작은 채소가게를 한 적이 있었다. 허름한 창고가 딸린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하셨다. 고등학교 다닐 무렵이었나 보다. 수업을 마친 뒤 아버지가 궁금하기도 하고 염려되기도 해서 시장으로 갔다. 가게랄 것도 없는 조그만 공간에 양파 몇 알씩 담긴 바구니가 놓여있었고 그 뒤쪽에 아버지가 우두커니 서 계셨다. 시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가게 앞으로 다가서자 아버지는 볼일이 있는 것처럼 슬그머니 창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양파 얼마예요?’하고 묻는 손님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처럼.

왜 나는 그때 아버지를 모른 척했을까. ‘양파 사 가세요. 한 바구니에 천 원입니다’라고 씩씩하게 말을 하지 못했을까. 아버지에게 다가서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가 무안해할까 봐 그랬을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버지를 부끄럽게 생각한 건 아닐까.

동생에게 아버지의 채소가게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어렴풋하게 생각은 나지만 오래 하시지는 못한 것 같다고 했다. 그 후로도 축사를 관리하는 일과 작은 공장의 경비를 했지만, 아버지의 직업은 자주 바뀌었다. 사고를 당해 여러 번의 수술을 피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건강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다. 양파를 팔고 축사를 청소하고 공장을 관리하는 일들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죽을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사셨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을 감지하셨을까. 자주 병문안을 오던 친구분이 혼자 사신다며 가끔 식사라도 사 드리라고 당부했다. 그날은 얼굴색도 편안해 보였고 기분도 좋아 보였다. 컨디션이 나아졌다는 말에 안심이 되어 옷도 갈아입고 집 청소도 하고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친정집은 우리 집과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있었다.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만나지 못했다. 이별이었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낯선 곳으로 힘겹게 발을 옮기고 있을 때 손은 잡아드리지도 못했고 잘 가시라 인사도 하지 못했다. 나는 출상하는 날까지 아버지의 관이 놓인 안방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잠이 들곤 했다.

‘아버지가 너무 그리워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어요. 낯선 곳으로 가신 아버지가 얼마나 두려우실까 마음이 아파요.’ 그녀의 글에서 슬픔과 그리움이 잔뜩 묻어난다. 아직은 아버지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지금은 그냥 그리워하면서 조금씩 슬픔이 옅어지도록 기다리자고 답을 보낸다.

올해도 어김없이 예순을 갓 넘긴 아버지의 기일이 지나고 예순한 번째 맞는 내 생일이 뒤따라 돌아왔다. 겨울비가 내리는 탓인지 당신의 부재不在 탓인지 오늘따라 눈이 유난히 맵다. 칼에 베인 듯한 통증이 묵직하게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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