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2월 전세가 기울자, 본국과 제주도를 최후의 결전지로 삼고 결(決) 7호 작전을 수립했다. 일제에 가혹한 수탈을 당한 제주는 섬 전체가 폭격으로 초토화될 위기에 놓였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맞이했다.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제주도민은 약 6만명에 달했다. 귀환한 도민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실직난을 겪었고 생필품과 의약품마저 턱없이 부족했다.
경제는 파탄 났는데 콜레라가 창궐했고, 대흉년이 들었다. 1947년 흉작으로 농민들은 내 줄 보리가 없었지만, 미군정은 매점매석 차단과 폭등한 양곡가격을 잡겠다며 보리를 강제로 공출해갔다.
미군정이 통치하면서 일제 경찰은 군정 경찰로 변신했다. 군정 관리의 부정·부패는 중앙 언론에 거론될 정도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1947년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가두행진이 이어졌다.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포하면서 민간인 6명이 숨졌다. 3·1절 발포 사건은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해 3월 10일 발포 사건에 격앙된 공무원과 교사, 학생, 회사원 등 166개 기관·단체가 참여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당시 치안을 책임졌던 조병옥 경무무장은 총파업에 참여한 도민들을 좌익세력으로 간주, 다른 지방의 경찰력을 대거 투입했다.
국가 공권력은 총파업을 벌인 학생과 직장인 등 2500여 명을 구금했다. 이 중 3명이 고문으로 사망하면서 도민들은 더욱 반발하게 됐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인 무장대 350명이 도내 12개 경찰지서를 공격했다. 유혈 사태는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풀릴 때까지 7년 동안 이어졌다.
섬 곳곳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주 전체 인구의 30만명 중 10%인 3만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됐다. 중산간마을 95%는 불에 타면서 폐허로 변했다.
제주4·3은 한 가족을, 한 마을을 넘어 제주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했다.
1948년 10월 17일부터 군경 토벌대가 주도한 ‘초토화작전’은 중산간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았다. 그 해 11월 17일 이승만 정권이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 선포하면서 양민 학살의 전주곡이 시작됐다.
국가 공권력은 중산간 마을을 떠나지 않은 주민들을 좌익세력으로 몰아붙였다.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으로 낙인찍혀 대신 죽임을 당하는 ‘대살(代殺)’이 성행했다.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후대들은 ‘연좌제’에 엮여 취업과 승진에 제약을 받았다. 그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이 컸다.
국민의힘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한 태영호 의원이 “제주4·3사건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말해 논란이 일고 있다.
태 의원은 “북한에서 대학생 시절부터 4·3사건을 유발한 장본인은 김일성이라고 배워 왔으며, 북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와 미군정의 보고서, 각종 사료에 ‘김일성의 4·3 지령설’은 없었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태 의원은 케케묵은 색깔론으로 4·3을 덧씌웠다. 4·3영령과 유족에게 또 다시 대못을 박은 셈이다.
제주4·3 대혼란기에 많은 도민들은 좌익세력으로 몰리거나 연좌제에 엮이지 않으려고 출생·혼인·사망신고를 사실과 다르게 했다. 그 통한의 세월에 유족들은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색깔론’은 제주4·3을 넘어 자칫 대한민국을 분열시킬 수 있다. 올해 열리는 제75주년 4·3추념식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해 유족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할 때다.
좌동철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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