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사라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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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진 / 동화작가

“혹 제주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장소가 여기 없을까요?”

제주 시내를 조망하는 것이 불편했는지 한 중년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여인이 말을 건네왔는데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더구나 도민이 아니라고 하기에 주책없이 많은 얘기를 나누고 말았다.

가을의 그림자가 물러난 지난겨울 초입으로 기억된다. 을씨년스럽던 초겨울 날씨가 모처럼 화사하기에 저녁 무렵 사라봉 공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제주 제2경이자 올레 18코스를 관통하는 사라봉은 성산일출과 함께 제주 최고 비경이 아니던가?

하지만 사라봉은 이제 제주 최고의 비경이라기보다 아픈 역사의 현장이라 해야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있는 일제 진지 동굴이 그렇고 연합군을 저지하고 진드르와 정뜨르 비행장을 사수하기 위한 동굴구축 흔적도 또렷이 남아 있어 다크 투어리즘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불편함도 밀려왔다.

설상가상 제주항 국제여객 터미널과 연안 여객 터미널만 수고(樹高)가 낮은 벚나무 사이로 잠깐잠깐 보일 뿐 제주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없는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탑동광장은 물론 산지 등대조차 보이지 않는다.

모 신문사에서 세운 사적고증 표석에는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 성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고 되어 있었지만 제주 성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장소는 그 어디에도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정상 서북쪽에만 가지치기 한 벚나무들이 납작 엎드려 약간의 전망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애시당초 심지 말았으면 어떠했을까? 아쉬움만 남는다.

나무 한 그루 맘대로 자를 수 없는 도시공원법이라든지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이 이런 안타까움을 연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한라산과 제주의 오름들 그리고 북쪽에 자리 잡은 제주 시내를 한눈에 조망하면서 떨어지는 해가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사봉낙조가 아닐까?

‘사라봉엔 이제 사봉낙조가 없는 것 같아요.’ 내려오는 길에 전주에서 왔다는 그 중년 여인의 하소연이 자꾸 머리에 맴돈다.

양식 있고 적극적인 위정자들이 많이 나와 도시공원법 특례적용이라든지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등을 좀 융통성 있게 개정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야 이 여인에게 오롯이 사봉낙조를 보여줄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이제 한파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바야흐로 해토머리이다. 폭설과 한파를 이겨낸 얼음새꽃과 매화가 봉우리를 터뜨린 지 이미 오래 이고 시나브로 움싹들이 몸집을 키우는 소리도 들려온다. 곧 개구리도 땅을 헤집고 나올 것이다. 봄이 오면 제주다움을 오롯이 눈에 담고 느껴보기 위해 제주들판을 거닐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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