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
갑과 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문두흥, 수필가/ 논설위원

우리는 보통 계약서를 작성할 때, 주도권을 지닌 쪽을 갑, 그 반대의 사람을 을이라 합니다. 보수를 주며 재화나 노동력을 제공받는 쪽이 갑이고, 보수를 받아 재화나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쪽을 을이라 하지요.

예를 들어 기업 간 거래에서 고객사와 영업회사와의 관계, 본청과 하청회사의 관계, 업소에서 고용주와 종업원의 관계, 임대계약에서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로 인해 ‘갑질’이란 말이 나오고 계약상의 상위관계로 위치한 갑이 하위의 을에게 계약 관계를 볼모로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갑질이라는 말이 사회 전반으로 퍼진 2010년대부터는 학문적인 의미보다 ‘동일 조직 내에서 권력에 의한 상하관계’라는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나 중요한 직위에 있는 자를 갑, 낮은 지위에 있는 자를 을이라 하지요.

갑은 보통 자기가 갑인지 모르거나 잘 실감하지 못합니다. 신문에 나오는 의도적이고 악질적인 갑질도 있으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갑질은 당하는 사람만 압니다. 갑질한 사람이 순진한 얼굴로 자신은 그럴 의도가 없었노라 한다면 할 말 없지요. 반면 을은 자신이 을이라는 사실을 알 뿐 아니라 순간마다 잊지 않지요.

갑은 작은 손해에도 민감합니다. 평소 자기가 갑인 줄 모르나 손해를 보면 자신의 억울함을 적극적으로 밝힙니다. 때로는 자기가 을이라 주장하기도 하지요. 재벌·국회의원·교수·목사에게 “당신이 갑”이라 한다면 그중 절반은 이렇게 응답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래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제가 을입니다. 요즘은 노동자·보좌진·대학원생·전도사가 갑이에요.” 그리고 자기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경험담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을은 자신의 억울함을 함부로 토로하지 못하지요. 을이 갑질을 폭로할 때는 이미 갑ㆍ을 관계를 청산하고 쓸쓸한 벌판으로 나갈 결심을 한 뒤였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잘못을 모르는 것도 갑의 특성입니다. 내가 하는 큰 잘못은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을의 잘못은 반드시 바로잡으려고 하지요. 또한 흥미롭게도 을도 같은 생각을 합니다. 을도 자기가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큰일이 벌어질 것처럼 늘 조심합니다. 갑의 잘못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남의 잘못에 신경 쓰지 않으려 합니다. 갑은 구체적 상황이나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법이나 규칙, 일관성을 더 중히 여기고 관심을 두지요.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정상적’·‘보편적’·‘중립적’ 기준은 을에게는 그다지 유리하지 않습니다. 당장 굶어 죽게 된 사람에게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서라 하면 서러울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법대로 합시다.”는 약자의 호소보다 강자의 으름장인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시간은 보통 갑의 편입니다. 갑은 시간을 질질 끌 여유가 있으나 을은 한시가 급합니다. 을이 뱉은 거짓말은 금방 들통 나지만 갑이 되풀이해서 오래 퍼뜨리는 가짜뉴스는 진짜가 되기도 합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을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해결할 시간이 없지요. 갑은 끝까지 버티며 자기의 주장을 지킬 수 있습니다. “끝내 진실이 밝혀진다.”는 말은 멋있게 들릴지 모르나, 을에게는 한가한 시간이 없기에 꿈에 불과합니다.

부모가 갑이고 자식이 을이었지만 자식이 성장해 돈도 잘 벌고 능력이 생기면 갑이 됩니다. 갑·을 관계는 불변의 위치가 아니라 언젠가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소정아빠 2023-02-27 22:14:54
좋은글 감사합니다

두리맘 2023-02-27 20:35:37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좋은글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