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새로운 창작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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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 논설위원

오늘날 섬을 문명의 렌즈로 보면 낭만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과거 식민주의나 지정학의 의미로 보면 온갖 고초가 따르기도 했다. 섬은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서 요긴한 피난처, 유형지, 새로운 창작의 산실, 유명 관광지 등으로 불린다.

1814년 유럽 동맹군에게 패퇴한 나폴레옹의 유형지는 지중해의 엘바섬이었는데,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해 재기했으나 이듬해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패퇴함으로써 영국군의 포로가 돼 대서양 해상에 떠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증권사 직원으로 일하다 실직한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 화가가 됐고, 고흐와의 불화 끝에 1891년 관광지로 부상하던 폴리네시아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도시 문명 아래서 탄생한 인상주의 화법을 버리고, 종합주의라는 자신만의 화풍을 이뤄 원시주의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다.

인도네시아 발리섬은 네덜란드 식민지로서 유럽 관광객들에게는 최후의 지상 낙원이라 불렸다. 동남아는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각축장이었는데 영국과 스페인은 포르투갈로부터 말라카의 지배권을 빼앗았지만 네덜란드에게 굴복했고, 1597년 무장한 네덜란드 상인들이 처음 발리섬에 들어왔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만든 것은 1602년 동인도회사를 통해서였다.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에 본부를 두고 향료 무역을 독점해 동남아 무역의 지위를 확고히 구축했다. 그 후 자바섬에서 커피, 후추, 쌀을 장악했으나 발리섬에서는 노예무역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네덜란드는 발리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894년 네덜란드는 발리 왕국의 세력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자 발리의 몇몇 왕국들을 무력으로 제압했다. 네덜란드의 발리섬 식민지 시대는 1908~1945년이다. 네덜란드는 발리를 타히티섬과 같이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유럽에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발리가 유럽에 널리 알려지면서 발리의 문화에 주목하게 됐다. 1920년~1930년대에는 유럽의 예술가와 발리 예술가들 간의 교류에 의해 발리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게 되고, 사회, 생활, 예술에 걸쳐서 눈에 띄는 변화를 맞았다.

현재 발리는 ‘신들의 섬’, ‘예술의 섬’으로 불린다. 특히 발리 회화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서양미술의 영향이었다. ‘발리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한 것은 1927년 독일인 화가 월터 스피스가 발리에 오고, 1929년 루돌프 보네가 발리 우붓에 정착하면서부터다.

특히 스피스는 회화를 비롯해 음악, 무용, 연극에도 조예가 깊어 발리 예술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쳤다. 스피스와 보네는 서양화 물감을 사용해 원근법으로 그림을 그리며 종교화 일색의 발리 전통 회화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발리 화가들이 유화물감과 캔버스로 그림을 그리면서 유럽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발리 출신 유명 화가들이 생겨났다.

발리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럽 미술을 수용하고, 발리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화법들이 탄생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가 발리의 전통문화 보호 정책을 펴고 이주 예술가와 발리 화가들의 적극적인 교류를 이끌어내어 오늘날 발리 미술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50년 8월 17일 발리섬이 포함된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네덜란드 식민정부로부터 벗어나 신생국가가 됐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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