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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주 수필가

햇살은 따사로운데 바람이 차다. 톡 쏘는 겨자소스를 먹은 것처럼 코끝이 알싸하다. 고향이라서 그런지 이곳 추위는 오히려 엄마의 손길처럼 편안함을 준다.

평택이다. 여기에는 두 아들이 살고 있다. 도울 일이 있거나 보고 싶으면 종종 올라오는 편이다. 내가 주로 거주하는 곳은 자그마한 빌라다. 간간이 커피잔을 들고 창가에 서면 넓고 평평한 논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얗게 서리 덮인 논을 바라보다가 예전 모내기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동네 사람들은 서로의 일정을 공유하고 어느 날은 이장네, 어느 날은 순식이네 하면서 날을 잡았다.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보니 서로에게 목소리 높이는 일도 많았다. “이봐, 여기 모가 부족하네, 더 가져와야겠어.” “거기! 줄을 좀 천천히 옮겨야겠는걸” 농사를 짓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했는데 이웃과 품앗이하다 보니 저절로 좋은 관계가 이뤄졌다.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이도 있었다. 그야말로 한 알의 곡식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자연이 주는 혜택 말고도 얼마나 많은 노고가 숨어있는 건지.

커피잔의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르고 추억은 나래를 폈다.

때맞춰 주인아주머니가 밥과 반찬을 이고 논두렁을 걸어올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점심 가져왔어요!” 한마디에 사람들이 논에서 나와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떼면 그 자리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풀을 뜯어 쓱쓱 문지른 다음 광주리 주변에 둘러앉고는 막걸리를 사발에 넘치도록 붓는다. 입안으로 단숨에 부어 넣자 옆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죽죽 찢은 김치를 입속에 넣어주었다.

한때는 그리 사람 냄새 나는 농사를 지었는데, 요즘은 기계로 혼자서 해결한 후 점심은 식당에서 먹는다. 편리하고 실용적인 면은 놀랄 만큼 좋아졌다지만 우리의 정서가 점점 사라지는 거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추수가 끝나고 휴지기의 겨울을 보낸 논이 다시 봄을 기다린다. 머지않아 이곳은 초록으로 물들고 봄의 연주가 시작될 것이다. 닭장 지붕 위로 보름달 같은 박이 아직도 주렁주렁 달려 있다. 넝쿨이 말라비틀어졌음에도 박은 여전히 둥글다. 새벽을 알리는 첫닭 울음소리에 시골의 서정은 더없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올 때마다 꼭 한 번씩 들르는 곳이 있다. 내리라는 마을에 있는 내리문화공원으로 핑크뮬리공원이라고도 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핑크빛 안개가 물결치는 것 같아 한 번 다녀가면 다시 오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다.

그 아래로 안성천이 흐르는데 여름에는 시원함을 더해주고 겨울에는 인적이 드물어 더 춥게 느껴지는 곳이다. 계절이 바뀔 즈음 철새들이 이 안성천 위를 지나가는데 수천 마리가 떼 지어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어느 날, 공원 한 바퀴를 돌고 오겠다며 나섰는데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이 새카매졌다. 처음 본 광경에 무섭고 두려워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철새들의 대이동이었다. 브라질에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킨다는 말의 의미를 눈앞에서 확인했다.

지구 반대편의 불행은 그들만의 불행이 아니다. 즐겁고 행복한 일도 그들의 기쁨만은 아니다. 나 하나의 작은 행동이 모두의 삶에 영향을 준다. 그러니 말 한마디라도 부드러운 미소로 대한다면 그 향기는 분명 행복의 토네이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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