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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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원 / 수필가

책을 놓아두고 가방에서 소포장견과를 꺼낸다. 아몬드를 조심스레 씹으며 창밖의 흐린 풍경을 내다본다. 서울에 와 오랜만에 KTX를 탔다. 반가운 사람들과 긴요한 일들에 시달리다 오늘 하루, 내 자신을 피난시킬 겸 광양으로 <루오 전>을 보러가는 길이다. 요람인양 기차에 흔들리며 쉬어보려는 속셈. 그런데 앞좌석의 두 여인, 오랜 지기처럼 소리를 낮춰 소곤대고 있다? 서로 다른 역에서 탔고 자리에 앉고서도 한동안은 조용했는데? 어라, 젊은이가 ‘그땐 정말 죽고 싶더라고요’라고 말한 것 같다? 나이든 여인은 ‘많이 힘들었겠어요’라 응수하고?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나는 뒷담화를 좋아한다. 뒷담에 잔잔히 돋아난 꽃(花)들처럼 가까이 소리 낮춰 주고받는 두런두런한 이야기(話)…. 나도 안다, 뒷담화란 게 그렇듯 몰랑몰랑 애잔한 것이 아님을. 몇 년 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라는 성 프란체스코 교황의 말을 듣고 놀라 사전을 찾아본 적이 있다. 그때까지 뒷담화를 ‘나중에 혹은 뒤에서 나누는 이야기’ 쯤으로 알았던 때문이다. 과연 그 뜻은 고약하고 사나웠다. ‘남을 헐뜯는 행위. 또는 그러한 말’이라니….

순간, 억하심정이 들었다. 그런 의미라면 비방이라든가 중상모략이라든가, 보다 선명히 다가오는 단어들이 많지 않은가! 그래서 정해버렸다. 나에게는 뒷담화가 여전히 뒷담의 꽃(花)이고 이야기(話)라고. 당시 혹은 당사자 앞에서는 감히 혹은 겸연쩍어 하지 못한 말을, 뒤늦게 혹은 그 사람 없는 데서 구시렁대 보는 조금은 비겁하고 소심한 뒷말이라고. 내게는 그런 순하고 부드러운 말 나눔이 필요해서다. 남을 해하는 험담이나 고자질이나 비밀누설과는 거리가 먼, 은근 억울해지거나 슬쩍 미안해져서 혹은 떠버리고 싶어져서 벌이는 소소한 말잔치가. 말로나마 기분을 인정받고 시샘 없이 응원 받고 싶은 게다, 나란 작자.

문제는 뒷담화 상대다. 나는 말하고 털어버렸는데 상대가 계속 문제에 머물면 곤란하니 기억력이 좋지 않아야 하고 내가 원체 자기중심적 나르시시스트임을 알고 있어 내 말을 곧이곧대로는 듣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 찾기가 쉽지 않아서다. 그뿐인가, 문제해결이나 영향력 행사에 과감한 의협파적 행동파도 대상에서 빼야한다. 내가 바라는 건 가벼운 동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뒷담화가 말처럼 쉽지 않다. 덕분에 내 일기장만 고생한다. 격정과 변덕의 하소연을 받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수난이다. 고상한 언어로 꾸민들 고자질과 청원이니 얼마나 시끄러우랴. 내 뇌 주름 자문자답 영역은 닿다 못해 매끈 반반해졌으리라. 지금만 해도 뒷담화에 대한 뒷담화를 너저분히 새기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만 연연하는 걸까? 사람들 정말, 내 식의 뒷담화 없이 세상을 견디는 걸까? 하기는 나도 청년 때는 뒷담화 같은 거 안 했다. 내 감정을 밝히고 내 생각을 드러내고픈 혈기에 오히려 입씨름에 즐겨 끼곤 했다. 하지만 말 화살에 자꾸 자주 쏘이면서 알았다. 노골적이고 직선적인 앞담화(?)가 사람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 언제부턴가는 아예, 속으로지만, 사람들에게 뒷담화를 부탁하는 나다. 일이 아닌, 품성이나 태도나 외모나 취향에 대한 흉은 제가 없는데서 보아주십사…. 그런 것은 수긍은 할지언정 바꾸기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즈음 내 뒷담화 사정도 바뀌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사건이 없어서인지, 입보다는 귀를 많이 쓰고 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오늘 제게 천사셨어요. 저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낙담했었거든요.”

잠결, 속눈썹 사이로 앞좌석의 젊은이가 스치듯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다음 역이 순천. 책과 필통을 서둘러 챙기는데 천사라는 말이 귓바퀴를 맴돈다. 알 것도 같다. 다시는 만나는 일 없지 싶은 사람이기에 털어놓을 수 있는 부끄럽거나 원망스러운 사정….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터뜨린 그것들을 내편이 되어 들어준 사람에 대한 감사…. 먹먹해져 가방을 닫는데 돌아가는 길, 옆자리가 벌써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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