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현(四賢)으로 추앙…숭앙받는 인물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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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동계(桐溪) 정온

정온, 조선 중기 문신…제주로 유배돼 향후 사액서원 봉향
정윤형, 경제학자…학문을 통해 사회·경제 정의 추구
정태무, 의사·시조시인…어려운 환자와 노인에 무료 인술
조규훈, 한국민단 중앙단부 단장…대한민국 무궁화장 추서
귤림서원은 조선시대에 제주에 유배됐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5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유교 교육 기관이었다. (사진=제주성총서-사진)
귤림서원은 조선시대에 제주에 유배됐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5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유교 교육 기관이었다. (사진=제주성총서-사진)

▲정온 鄭蘊:1569(선조2)~1641(인조19), 문신. 유배인.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혹은 고고자(鼓鼓子), 본관은 초계, 진사 정유명鄭惟明의 아들이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을 처형하게 한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제주로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으로 동년 1월, 유배에서 풀려 상경했다. 조정에서는 1682년(숙종8) 귤림서원에 사액하고 정온을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과 함께 제주 사현(四賢)으로 추앙해 사액서원에 봉향하게 했다. 뒤에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추향(追享)하면서 제주 오현(五賢)이라 해 가장 숭앙받았던 인물이다. 

동계는 1614년(광해군6) 전라도 해남에서 승선, 동년 8월 대정의 유배소에 도착했다. 적사(謫舍)는 대정 객사의 동문 안에서 북쪽으로 수십 보 들어가 성벽 안의 한 민가였다. 특별히 대정현감 김정원(金廷元)은 적소(현 안성리·安城里) 경내에 서재(書齋)로 쓰도록 두 칸 되는 집을 지어줬다. 
1799년(정조23)에 대정현감 부종인(夫宗仁·제주)은 동계의 유허지에 서당을 세워 그를 흠모했다. 또 1842년(헌종8) 이원조(李源祚) 목사가 ‘정온적거유허비(謫居遺墟碑)’를 세우고, 송죽사(松竹祠)를 창건, 동계를 봉향했으며 추사 김정희가 편액했다. 

동계 정온 유허비(遺墟碑).
동계 정온 유허비(遺墟碑).

정온은 임해군옥사에 대해서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차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해 이원익(李元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했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돼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허목(許穆), 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滉)·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했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성원(藍溪書院)에 제향됐다. 

▲정윤형 鄭允炯:1937(일제강점기)~1999, 경제학자, 대학 교수, 제주4·3연구소 이사장. 제주시 오등동(오드싱)에서 태어나 광주서중과 광주고를 거쳐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 동 대

학원에서 경제과를 마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0년부터 홍익대 교수로 재임하면서 1994년 동 대학교의 법정대학 학장을 역임, 대학 선배인 박현채와 함께 자주적인 민족경제론(民族經濟論)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4·3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보여 죽을 때까지 제주4·3연구소 이사장을 맡았고 강만길(姜萬吉), 김중배(金重培), 김찬국(金燦國) 등과 제주4·3범국민위원회를 창립해 공동대표를 맡아왔다. 학문을 통해 꾸준히 사회·경제 정의를 추구해 온 그는 행동하는 지성인이라고 불렸다. 
1980년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의 서명에 동참, 결국 3년 동안 해직당하는 시련을 겪었으며 사회·경제적 현안(懸案)이 발생할 때마다 ‘한겨레신문’ 등의 논단을 통해 대안을 지적했다. 그래서 1988년 한국사회과학연구소를 설립, 소장으로서 실증적인 연구 자세와 사회의 모순에 대해 대안을 제시했고 이 연구소에 국내의 진보적 학자 대부분이 적(籍)을 두고 있을 정도로 그는 한국 사회과학계의 대부(代父)라 할 수 있다. 
고향 제주에 대한 관심은 1987년 9월 제주사회문제협의회의 창립부터이다. 초대 회장으로 송악산(松岳山)의 군사기지 반대, 특별법 독소조항 반대 등에 앞장섰다.

정태무

▲정태무鄭太戊:1918(일제강점기)~1988, 의사. 시조시인(時調詩人). 호는 우송(愚松), 성산읍 신양리(방뒤)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일본의 괴뢰 정권 만주국(滿洲國)으로 건너가 의사 시험에 합격하고, 목릉현(穆陵縣) 현립(縣立)병원 외과과장으로 재임, 조국이 해방되자 귀국, 1946년 2월 미(美) 군정청에서 시행하는 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증을 받았다.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본도에서도 동호인(同好人)들을 모아 제주도시조문학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선출됐다.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8월 제주도립 제주의원 내과과장으로 발령받았으며 6·25 전쟁이 발발돼 1953년 육군 군의관으로 소집됐다. 5년 동안 군의관 생활을 마쳐 귀향, 제주 시내에 정태무 병원을 개업했고 1975년 대한결핵협회 제주도지부장으로 임명되어 2년 동안 재임하였다. 1980년 10월 이후 제주 중산간 무의촌의 보건 문제에 관심을 가져 글을 발표, 이에 따라 무의촌을 순회하면서 어려운 환자와 노인들에게 무료로 인술을 펼쳤다. 
1987년 6월 그의 저서 ‘제주도 현대의학’을 간행, 본도의 현대의학 여명기(黎明期) 50년을 조명하고 또 인술에 종사했던 의사들의 의학 경력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한편, 문학에도 흥미를 느껴 1983년부터 본격적인 시조작가로서 활동, 동년 3월 ‘시조문학’지에 추천이 완료돼 시조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1986년 시조집 ‘탐라(耽羅)’를 발간하는 저력을 보였다.

조규훈이 설립한 백두학원 전경.
조규훈이 설립한 백두학원 전경.

▲조규훈 曺圭訓:1906(광무10)~2000, 재일교포, 한국민단 중앙단부 단장, 백두학원 창시자. 본은 창녕, 조천면 신촌리(숙군)에서 조선환(曺璇煥)의 아들, 향리에 사는 조운현(曺雲鉉)의 당숙(堂叔), 1945년 9월 추석날 동포 60여 명을 모여 백두동지회를 조직해 첫째 단결, 둘째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셋째 국가재건의 밑거름이 된다. 라는 강령을 채택했다. 
민단(民團) 중앙본부 단장(1949. 6~1950. 3)에 취임하면서 학교 일은 그만뒀다. 1948년 주일(駐日)대사관 건물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1300만원을 기부하니 도쿄 긴쟈(銀座)에 대한민국 대표부 건물과 관사를 구입하게 했다. 한국민단 제7·8대 단장을 역임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해 대한민국 무궁화장(無窮花章)을 추서, 그의 옛 자택은 제주도 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는 17세 때에 도일(渡日)해 고베(神戶)에서 막노동판에서 일했다. 1941년 전쟁 중에 고무공장을 인수해 사업을 궤도에 올렸다. 먼저 귀국 사업을 서둘자 회원도 6500명이나 됐다. 한편 문화 사업으로 도쿄에서 1946년 3월 건국공업학교, 건국고등여학교를 출범, 이런 창업자이며 초대 이사장이 됐다. 
이런 가운데 해방 직후의 애향운동으로 향리에 조천중학교 창립에 솔선해 건축자재를 일본에서 구입해 제주로 운반하는 등 눈코 뜰 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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