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함과 성실함
분주함과 성실함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치완,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벚꽃이 한껏 자태를 뽐낸다. 봄은 봄이다. 오랜만에 대면 입학식을 치렀던 새내기들의 기대처럼 대학 교정에는 활력이 넘친다. 학생 커뮤니티에 올라온 “지금 대학에 간절히 바라는 것은”이라는 제목의 게시글 본문이 “종강”인 것도, “봄을 알리는 제비 다리처럼 교수님의 다리를 댕겅”이라는 댓글도, “아얏!”이라는 대댓글도 “대학의 주인인 학생이 돌아온” 것을 실감하게 한다. 이게 어른들이 추억하고 부러워하는 청춘이다.

엘리엇(T.S.Eliot)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것도 추억과 부러움 때문일 것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생명이 움트고, 커가는 것을 재촉하는 봄을 잔인하다고 말하면서, “겨울은 따뜻했었다.”고 기억한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고 생각하면서 혹한을 견뎌낸 탓이다. 그렇게 보정된 기억을 흔드는 봄의 들뜸을 시인은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문득 팬데믹 직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대사 하나가 기억난다. “법비와 정의에 대한 명대사”를 많이 남겼다는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악은 성실하다’는 대사가 극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어요. 선이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항상 한발 앞서서 그것을 막는 것이 악이잖아요. 결국 성실한 악에 계속 눌리던 선이 마지막에 가서야 승리하죠.”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이내 “악과 성실함”을 한데 묶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악은 성실하다.”는 “눈을 감으면 보인다.”처럼 모순된 표현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서로 모순되는 어구를 나열하는 ‘형용모순(Oxymoron)’이다. 정말 그런 듯싶기도 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성실해야 하는 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악과 성실함을 묶는 것은 성실하게 사는 소시민인 우리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감과 현실적인 무력감이 든다. 그러니 어떻게든 반박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미끼를 문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경험상 악은 선보다 항상 앞서 있는 듯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변죽만 울리고, 거두어들이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성실한 것이 아니라 분주(奔走)한 것이다. 성실함이란 본디 해야 할 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이에 비해 ‘거짓말이 참말이 되는 경이’가 오늘날 너무 자주 목격된다 해도, 거짓말을 하려면 분주할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 않는 것인데다, 그것을 감추려면 다른 무언가를 꾸미고 속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성실하다. 이와 달리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달콤한 말과 이로운 이야기로 꾀는 이도 있다. 그런 이는 분주할 수밖에 없다. 그의 가장 큰 해악은 분주한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꾀어 분주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성실하게 제법 잘 살아가고 있는 나와 너를 탓하게 하고, 분주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봄이 오는 때를 맞추어 성실하게 핀 꽃에 취할 여유를 빼앗는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성실하다. 그것에 취하는 우리도 그렇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