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의 그늘,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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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제주장수복지연구원장/ 논설위원

마당의 동백꽃들이 유난히 붉다. 혹여 백세 어머니를 위한 마지막 선물일까? 연로하신 분을 모시고 사노라면 사소한 일에도 의미를 두게 된다. 동백꽃 덕분인지 어머니의 백세 생신이 전파를 탔다. 방송국의 집요한 구애에 이끌려 특종세상에 나온 어머니가, 그야말로 특종을 치는 쾌거를 이뤘다. 미국에서 반가운 인사들이 날아오더니, 고향마을에서도 ‘삼춘, 텔레비전에서 봐수다’라며 목메인 전화들이 찾아들었다.

어머니는 미국으로 이민 간 아들의 요청으로 볼티모어에서 17년을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국으로 돌아와서, 보목마을을 터전 삼아 20년째 살고 있다. 우리의 고향인 대포마을과 볼티모어, 보목마을은 한결같이 바다를 접하고 있다. 바다는 어머니에게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6살 때, 바다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당신 곁을 지켜주는 것 같다’는 어머니의 고백처럼, 바다의 품은 언제나 넓고도 깊었다. ‘바당을 믿고서 열 명을 낳았고, 덕분에 2남7녀를 무사히 길러낼 수 있었다’는 어머니는, 50년을 대포바당에서 물질한 제주해녀다. 강원도에서 물질할 때는 그 곳 총각들이 ‘좀녀영 결혼허민 밥통 봉근다(줍는다)’고 하더라며, 처녀처럼 얼굴이 발개지는 어머니. 제주도가 출간한 ‘숨비질 베왕 놈주지 아녀’라는 제주해녀 생애사 조사 보고서에는, 어머니의 그 마음이 ‘조냥허곡 부지런허민 하늘이 돕는다’는 글로 새겨져 있다. 얼굴 어디에도 삶의 그늘을 찾아볼 수 없는 강인함과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 자신감으로, 어머니는 91세의 노익장을 드러내신다.

그 어머니가 오늘 아침에는 울었다. 눈이 부시도록 쏟아져 내리는 봄 햇살 탓에, 호기롭게 대문을 나선 게 화근이었다. ‘이런 날은 어디라도 소풍을 떠나야지’라며 몸통째 툭툭 떨어지는 동백들의 배웅 또한 눈물의 단초가 되었다. 게다가 정함 없이 길을 나선 우리에게 해녀 탈의장에 세워진 오토바이들이 결정타를 날렸다. ‘아하, 오늘이 물질하는 날이라면 대포 바다로 가보라’고.

‘대포 바다는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는 김순이 시인의 노래처럼 서귀포를 지나 법환, 강정, 대포로 갈수록 바다는 점점 신나게 들썩였다. 파도가 부서지며 산산이 쏟아지는 포말들이 아침햇살에 영롱하게 빛났다. 역시 대포 바다는 아름다웠다. 탈의장에는 망실이를 손질하는 삼춘들이 일찌감치 나와 있었다. 얼마나 바다를 누비고 다녔으면 저리도 새카맣게 절여졌을까? 첫눈에 보아도 틀림 없는 조카가, 우리를 보더니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니, 삼춘! 여기가 어디랜 와수과?’라는 제이를, 어머니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먼 산 보듯 무심한 표정이더니, 갑자기 덥썩 안으며 울먹인다. ‘아고, 우리 설운 제이로구나. 종택이 어멍은 어디 가시니?’

종택이 어멍은 어머니가 제일 아끼던 조카다. 대포마을회의 큰갯마을(2001)에 의하면 1948년 11월 19일, 서청이 중문리·상예리·색달리·하원리 주민 18명을 대수구우영에서 집단 학살할 때 남편이 죽었다. 27세의 종택이 아방은 마을을 대표하는, 그야말로 전도양양한 일등 청년이었다. 종택이 어멍은 바다를 남편삼아 남매를 키우면서 죽을 때까지 물질을 하였다. 그녀가 바다에서 죽던 날, 망실이에는 빈 소주병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그리웠을까? 제이는 어머니를 안고 울었다. ‘언니는 좋은 디 가수다. 꿈에도 그리던 아방한티….’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았다. 백세를 살아가는 어머니의 그늘처럼, 오늘도 이 섬의 어미들을 눈물짓게 한다. 가슴속에 새겨진 역사이기에 숨을 쉬며 대를 이어 전해지리라.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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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표 2023-04-03 08:42:38
오늘도 감동입니다.
힘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