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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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봄은 새로 바라봄이다. 그제야 새봄이 마음에 스민다. 그 봄이 그 봄이라 여기면 조락의 발걸음만 다가온다. 그러나 새로운 눈길에는 천년 고목에도 새롭게 피어난다. 예제서 바라보는 꽃들은 내게 첫 꽃이며 첫 마음이다.

봄은 다양한 언어로 희망을 선물한다. 죽은 듯이 한파를 견뎌온 나목들도 싹을 내밀며 연둣빛 인사를 건넨다. 어둠 속에 웅크리던 화초들도 흙을 밀치며 환호한다. 봄볕으로 포근히 감싸주는 자연의 숨결엔 응원의 메시지가 그득하다. 함께 살아가자는 말, 귀 닫아도 들려온다.

마음을 달뜨게 하는 것은 꽃의 눈빛이다. 설레는 속내다. 마당 구석에서도 초대하지 않은 자주괭이밥이며 제비꽃이 수줍게 피었다. 콘크리트 틈새에 옹색하게 자리한 민들레도 노란 웃음 야무지다. 사람들이 붙여준 꽃말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니 행복하단다. 그러면서 자기는 무성 생식하지 않는다며 다음부턴 민들레 홀씨라는 말은 삼가라 한다.

뭉쳐야 힘이 되는가. 아무래도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난 꽃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길가 손바닥만 한 자투리땅에 어깨 결은 유채꽃들이 노랑 물감 질펀하게 떨군다. 1970년 충북 출신 대학 동창이 시골로 놀러 왔을 때, 어머니가 된장 풀어 끓인 유채나물국과 보리밥만으로도 맛있게 먹었다던 그 말이 왠지 화인처럼 남았다.

굳이 명소가 아니더라도 동네길 걷노라면 한두 그루 벚나무가 펑펑 축포를 쏘아댄다. 불꽃놀이 따로 없다. 꽃 멀미에 걸음이 휘청인다. 저렇게 살면 한순간도 천 년인 것을. 온몸을 하얗게 태워 세상을 밝혔으면 더 이상 무얼 탐하랴.

마당에선 복숭아나무가 처연하게 봄을 맞는다. 몇 년 전 오일장에서 묘목 하나 사다 심었는데 지난해엔 열매가 꽤 달렸다. 다 커야 아기 주먹 정도인데, 앙증맞은 것들이 몸피를 불리며 Y자형 대들보를 한 뼘 정도 찢어놓는다. 부리나케 근처 까마귀쪽나무 가지 잘라다가 휘어지는 가지들을 떠받치고 벌어진 가지를 철사로 서너 번 동여매며, 연리지처럼 껴안기를 바랐다.

찢긴 가지들은 수액을 흘리며 서로 꺼당겨 보지만 선연한 상흔만 남긴 채 겨울을 났다. 이제 한쪽 가지는 복사꽃 만발하여 분홍 옷 자랑이 한창이다. 한데 어쩐 일인지 다른 쪽 가지는 환자처럼 겨우 꽃망울들을 매달기 시작한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애면글면 더디 벙그는 가지로 마음이 쏠린다.

돌아보니 아득히 흘러왔다. 1960년대 초등학생일 때 이대 쪼개어 집게를 만들고 송충이 잡아 빈 병 속으로 집어넣던 기억이 스친다. 중학생일 땐 삼나무 열매를 채집해 오라는 과제를 열심히 수행하지 않았던가. 타잔처럼 삼나무에 올라 낫으로 열매 매단 가지를 후려치고 마대에 담아, 끙끙 짊어지고 학교로 가져갔었지. 교사로 고등학생들 데리고 어승생 수원지 주위에서 식목 행사를 펼쳤던 기억도 어슴푸레하다. 산림녹화 깃발을 들고 민둥산을 푸르게 가꾼 세대로서 푸름 속에 와락 안기고 싶어진다.

정치의 장에도 봄꽃들이 활짝 피어 증오의 경연을 화합의 축제로 바꾸길 소망한다. 경멸만큼 경멸적인 것은 없다. 악마와 싸우노라면 자신도 악마가 돼버린다는 말을 새겨듣길 바란다.

내일은 78회 식목일이다. 버려진 한 조각 땅에, 아니 마음밭에나마 꽃나무 한 그루라도 심으면 좋겠다. 초록 생명을 키우는 일은 지구를 위한 무릎 꿇은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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