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의 영령이 씐 사람들, 현기영·강우일·김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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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비평가/ 논설위원

삶이란 게 뜻한 대로만 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귀신이 씐 듯 살아내게 되는 삶이란 것도 있나 보다. ‘우리는 왜 제주 4·3을 말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평화와 통일,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대담(4월 1일,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주최, 한상희 사회)에 참여한 현기영 작가, 강우일 주교, 김종민 위원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현기영은 4·3의 영령들이 자신을 선택해 억울함을 씻어내려 한 것 같다고 했다. 4·3을 공론화하는 데 첫 장을 연 『순이 삼촌』(1978) 때문에 보안사에 끌려가 저승문 가까이 가는 고문을 당했던 그는 한동안 4·3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제주 아이들을 다룬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를 썼다. 그런데 거기서도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담으려니 또 4·3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두 번씩이나 고문을 당하는 꿈을 꿨는데, 보안사에서 얻어맞았던 것처럼 고문을 당하는데 고문하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 4·3 영령들이더라고. 나를 고문하면서 ‘야, 네가 뭐 한 거 있다고 4·3에서 벗어난다는 거냐.’ 이러는 거예요. 4·3 귀신이 씌어서 40년 넘어가는데, 인생은 짧고, 그냥 4·3 속에 살아야지.”라고 했다.

강우일 주교는 2002년도에 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장을 맡아 제주에 내려간 후 4·3의 진상을 밝히는 데 앞장선 분이다.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안 과제가 있을 때마다 맨 먼저 앞장서 왔다.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의 하느님을 말했다. “제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 세상 속에 항상 깊은 관심을 가지고 뛰어들어 오시는 분이고 특별히 신음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계신 분이라 믿습니다. 신음하는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어긋납니다.”라고 했다. 이스라엘의 마사다 성지 순례에서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대인들이 노예로 끌려가기를 거부하고 자결한 모습을 보면서, 제주 4·3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통찰함으로써 우리 후세에 이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절절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인권위원회를 탄생시키고, 4·3의 진상을 규명을 위해 노력해 왔다.

김종민은 1988년 기자로 4·3 취재반에 속해 인터뷰를 한 유족이 7000명이 넘는다. 취재를 시작한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생각했다. “40년씩이나 지난 일들을 두고 할머니들이 눈물을 뿌리는 거예요. 가족들이 눈앞에서 참혹하게 죽어갔던 모습을 어떻게 잊겠어요. 내가 이렇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으신다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기록하지 않으면 조선 후기 제주 민란이 풍문으로만 남았듯, 4·3도 풍문으로 남게 되니 희생자분들 이름 한 자도 틀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입 뻥끗하지 못하던 4·3, 7년 7개월의 기록은 김종민을 비롯한 4·3취재반의 노력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 그리고 분단에 반대하고 통일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를 담은 제주 민중의 항쟁, 이에 겁을 집어먹은 이승만 정권의 초토화 작전으로 이어지는 학살의 역사가 그들의 취재를 바탕으로 퍼즐처럼 맞춰질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제주도민이 미소 냉전체제의 희생물이 된 사건이 4·3이라 했다. 삐뚤어진 반공주의를 내세워 무고한 제주도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이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4·3과 함께 하며 아무리 슬퍼도 비통해하지 않으면서 4·3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꿈꿀 것은 화해와 상생의 평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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