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청’이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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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제75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을 앞두고 제주4·3이 ‘북한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고 주장하는 현수막이 제주 전역에 내걸렸다. 오영훈 도지사, 김경학 도의회의장, 김광수 교육감은 23일 공동입장문을 내고 “4·3을 다시 통한의 과거로 끌어내리는 역사왜곡 현수막을 내려달라” 요구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등 4·3 관련 단체들도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4·3진실을 왜곡하고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의적 선동에 책임을 끝까지 묻겠다“고 천명했다.

이런 와중에 느닷없이 서북청년단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4월 3일 4·3평화공원에서 집회를 갖는다고 예고했다. 도민사회의 분노는 들끓었다. ‘서북청년단’ 이들은 누구이며 제주와 4·3과는 어떤 관계이기에 이들의 제주집회가 도민사회 관심사로 떠오른 것일까? 4·3평화공원 진입로에 내건 현수막 중 “서북청년단이 제주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왔느냐? 몰랐으면 무식한 거고, 알고 왔으면 사람이 아니다”란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서청, 이들의 정체를 살펴보기로 하자.

‘서청’은 서북청년단의 약칭이다. 해방직후 분단 상황에서 평안남도·함경북도·황해청년회 등 북한 출신 청년단체가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 모여 결성한 단체이다. ‘서북청년단 제주도지부’는 1947년 11월 2일, 제주시 옛 제주극장에서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제주에 들어왔다는 기록은 1947년 3·1절 총격에 의한 3·10총파업으로 박경훈 지사가 사임하고, 유해진 도지사가 부임하면서 경호원 격으로 7~8명의 서청 단원을 데리고 왔다고 전해진다. 이후 ‘서청’ 은 제주사회의 격변기마다 제주에 들어왔다.

첫 번째는 유해진 도지사가 부임하면서 7~8명 데리고 온 이후 4·3 발발 직전까지 입도한 ‘서청’은 500~7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두 번째 입도는 4·3 발발 직후 대거 제주에 들어왔다. 그 당시 중앙서청단장인 문봉제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요청에 따라 4·3사태 진압 요원 500명의 서청단원을 급파했다”고 증언했다. 세 번째는 1948년 10·19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과 12월 사이에 최소한 1000명 이상 들어왔다.

이들은 들어오자마자 경찰과 군인(경비대)으로 옷을 갈아입고 토벌 주역이 되었다. 이 당시 서청특별중대원으로 성산리에 거주했던 노윤복씨는 2002년 증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한림, 월정, 성산 등지를 순회하며 주둔했습니다. 9연대가 철수하고 2연대가 주둔하자 월정리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특별중대원 88명은 그대로 2연대 11중대 소속이 됐습니다. 한림면 귀덕리에서 총살이 있을 때 내가 일부러 빗나가게 쏘아 한 사람을 살린 적도 있습니다.”

서귀포시 중문성당은 천주교 제주교구가 2018년 ‘제주4·3기념성당’으로 지정하여 4·3으로 숨져간 영령들을 기리는 4·3성지이다. 당시 중문마을에는 2연대 1대대(서귀포 주둔) 4중대(4소대), 서청특별중대가 주둔했다. 중문지역 학살은 서청특별중대가 수행한 것이고 지금의 중문성당은 중문지역 주민 학살터였다. 이곳에서 무려 17회에 걸쳐 71명이나 숨졌다.

말만 들어도 몸서리쳐지는 서북청년단! 4·3 때는 이승만과 미군정의 비호를 받았지만 지금은 누구의 비호를 받고 평화의 섬 제주에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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