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금수(三禁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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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조선 시대에 제주도(濟州島)는 육지와 격리된 절해고도로 최적의 유배지였다. 해로 900리다. 그러니 중죄를 저지르거나 큰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면 유배되지 않았다. 수월하지 않은 뱃길. 풍파만리 파도 때문에 조야(朝野)가 다 두려워했다.

유배객이 탄 배가 전라도 해남·강진·영암 등지에서 출발해 보길도나 소안도 또는 진도를 거쳐 제주목 가까이 화북포나 조천포에 도착해 인계됐다. 조선 시대에 300명에 이르는 고관 대작이 제주도에 유배돼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한 광해군과 비운의 죽임을 당한 소현세자의 세 아들과 손자가 그들이다. 보우 스님, 정 온, 송시열, 김정희, 최익현 그리고 한말의 거물 정객 김윤식과 박영효로 이어졌다.

유배의 유형도 갖가지. 죄인을 고향으로 낙향시켜 그곳에서 본향에서 살도록 했던 본향안치, 유배지로 가는 도중 일정한 곳에 머물러 살게 하던 도중 부처, 활동 반경을 넓게 하는 것으로 유배지 안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던 주군안치. 제일 혹독한 것이 위리안치였다. 유배인이 사는 집 울타리에 가시를 두르고 그 안에서만 살게 한 것으로 말 그대로 절도안치나 다름없었다. 추사 김정희가 그런 고통을 겪었다.

오로지 바람과 바닷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고독 속에 언제 방면될지 알 수 없는 시간과의 싸움으로 나날을 견뎌 내야 했다. 각고의 고통과 절망 속에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이 됐을 것이다. 추사는 9년이라는 적소(謫所) 생활로 추사체와 세한도를 완성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놀라운 결실이다.

유배객들이 몰려왔던 제주도에는 유배자들이 싫어하는 삼금수(三禁樹)라는 게 있다. 협죽도, 동백나무, 버드나무다. 언제부터인가, 고통의 시간을 갇혀 사는 그들에게 금기시(禁忌視)하는 관념이 싹텄던 것이다.

협죽도는 그 모양이 버드나무와 비슷한데, 꽃이 복사나무와 닮아 유도화라고도 한다. 특히 잎에 치명적 독성분이 들어 있다. 주로 잎, 줄기, 종자, 뿌리에 들어 있는데 치사율이 높다. 심혈관 증상에다 설사가 심하면 혈변을 동반할 뿐 아니라 심장 박동이 심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채취한 독을 화살촉에 발랐다잖은가. 6,70년대 제주에 지천이었던 게 유독성이 알려지면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김녕 만장굴 진입로에 숲을 이룬 것은 아마 행정당국의 고민이 따랐을 법하다.

조선 시대에 사약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유배객들 눈에 거슬렸을 게 아닌가. 거리낄 수밖에 없다. 청산가리보다 강한 살인적인 독을 가진 나무다. 젓가락으로 사용했다 사망한 사례도 있다 한다. 언제 제거당할지 모르는지라 유배인들이 첫 번째로 두려워했다.

두 번째는 동백나무다. 유배돼 혼자 사노라면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를 겪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바람만 씽하고 지나도 가슴 움칫하기도 했을 것 아닌가. 동백나무는 꽃을 무참히 떨어뜨린다. ‘시들기 시작하자마자 툭 통째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언제 저렇게 될까 싶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세 번째 비위에 거슬리는 나무가 버드나무다. 버드나무는 가지가 줄기에서 잘 떨어지는 데다 미풍에도 하늘거려 줏대 없어 보인다. 반골 기질을 가진 유배자에겐 영락없이 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배로 비쳤을 것이다.

이들 삼금수는 제주에 온 유배객들에게 끔찍한 증오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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