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콤플렉스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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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편집국 부국장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생과 교사 등 약 3000명이 해병 3·4기로 입대했다. 이들은 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이어 9·28서울 수복, 도솔산전투, 펀치볼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무적해병’(無敵海兵)의 원조였던 노병(老兵)들과의 인터뷰에서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었다. 수송선에 오를 때부터 ‘빨갱이 XX’라는 말과 함께 멸시와 냉대를 받았다고 했다.

당시 제주는 4·3의 광풍으로 생채기가 채 아물지 못했다. 해병 3·4기는 목숨을 걸고 싸우고 나서야 ‘빨갱이’라는 오명을 벗었다고 했다.

제주4·3이 전개되면서 제주도민들에게 ‘레드 콤플렉스’가 씌워졌다. 산에 갔다는 이유로, 가족 중에 한 명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좌파 또는 종북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70여 년 전 구국의 용사들마저 적색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신현준 초대 해병대사령관은 참전실록에서 ‘제주 출신 해병 3·4기는 불안한 전장에서 병영이나 전방 전선에서 타 지방 사병과 달리 이탈자가 단 한명도 없었고, 용감무쌍한 장병들이었다’고 회고했다.

해병 3·4기는 해병대 제2창군을 이뤄낸 주역이 됐다. 지금,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우리 전력(戰力)이 바로 해병대다.

제75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을 맞아 70년 전부터 제주도민들을 억눌러 왔던 색깔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공화당과 자유당, 자유민주당, 자유통일당, 자유논객연합은 도내 80여 곳에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해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4·3 당시 양민 학살에 앞장섰고, 군·경 토벌대보다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서북청년단’ 이름을 딴 극우단체까지 등장했다.

서북청년단을 계승했다는 이 단체는 추념식이 열리는 날 4·3평화공원 진입로와 제주시청 조형물 앞에서 집회를 예고했다.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4·3사건은 김일성 지시로 촉발됐다’고 발언했다.

제주4·3 단체들은 태 의원의 발언을 역사 왜곡으로 규정, 태 의원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비판이 계속됐지만 태 의원은 굽히지 않았고, “어떤 점을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사실상 사과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자신은 북한 대학생 시절부터 4·3사건을 유발한 장본인은 김일성이라고 배워 왔으며, 북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했다.

제주4·3이 촉발된 것은 ‘김일성의 지령설’이나 ‘공산 폭동’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관련 사료가 차고 넘칠 정도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전날인 지난해 3월 8일 제주 유세에서 “4·3사건 유가족과 도민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윤석열 정부는 정말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지난해 보수정당 출신 당선인이나 대통령으로는 처음 추념식에 참석해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바로 우리의 책임이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올해는 여러 국정 일정을 이유로 이유로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새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맞이한 추념식 때 레드 콤플렉스 망령이 되살아났다.

윤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석,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길을 내밀었으면 해묵은 색깔론과 정쟁은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4·3의 아픔을 치유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약속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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