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서 詩와 사랑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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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제주목사 조정철

조승옥, 애월읍 납읍리 출신…전 제주도의원
조엄, 일본통신사…제주도에 고구마 종자 전래
조인관, 의병 활동…기병 결의·병력 동원 주도
조정철, 유배 당시 제주 풍습 담은 시집 간행 
제주에 도착하자 마자 아내가 자결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 조정철은 제주 여인 홍윤애와의 만남을 통해 위안을 얻게 된다. 홍의녀로 알려진 홍윤애는 조선 영·정조 때 제주목에 살던 여인으로 일명 홍랑(洪娘)이라고도 불린다. 사진은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의 구릉에 자리 잡은 홍윤애의 묘.
제주에 도착하자 마자 아내가 자결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 조정철은 제주 여인 홍윤애와의 만남을 통해 위안을 얻게 된다. 홍의녀로 알려진 홍윤애는 조선 영·정조 때 제주목에 살던 여인으로 일명 홍랑(洪娘)이라고도 불린다. 사진은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의 구릉에 자리 잡은 홍윤애의 묘.

▲조승옥(趙昇玉):1923~?, 제주도의원, 애월읍 납읍리에서 태어나 초등교사로 근무, 해방후 사립고산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0년 12월 12일 제주도의원선거에 야당인 민주당으로 입후보해 김병훈을 누르고 6385표로 당선, 산림조합 제주도조합장을 지냈다.

조엄
조엄

▲조엄趙:1719(숙종45)~1777(정조1), 문신. 제주도로 고구마 종자를 전래시킨 일본 통신사.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본관은 풍양, 강원도 원성(原城)군에서 이조판서 조상경(趙商絅)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엄의 저서 ‘해사일기(海槎日記)’와 그의 손 조승영(趙承永)의 ‘운석유고(雲石遺稿)’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고구마를 전래한 것은 1763년(영조39)부터 이듬해에 걸쳐 견일통신정사(遣日通信正使)로 대마도의 좌수나포(佐須奈浦)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고구마 종자를 가져온 것이 처음이다. 
고구마가 제주도로 들어와 구황 식물로 도민의 식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같은 해 8월 3일 일본통신사로 서울을 출발, 10월 6일 대마도에 도착 동 10일까지 머물렀다. 그가 처음으로 고구마 종자를 부산진에 보낸 것은 바로 대마도에 5일간 머물 때 이루어졌다. 

또 두 번째는 1764년 6월 18일 일본에서 돌아올 때 그는 제1차분을 즉시 제주도로 전해지게 하고 제2차분은 동래부 교리(校理)에게 위탁하여 채종 후 익년에 보내게 했다. 

그는 고구마 종자를 서울로 보내어 종자를 캐려 했으나 실패할 것을 우려해 기후와 풍토가 대마도와 비슷한 제주도로 보내어 차차 온 섬으로 분포 재배하게 했다. 
이는 문익점의 목면과 같은 공이라고 생각했다. 제주에서는 이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일컬으며 그 덕을 기념하고 있다. 

▲조인관趙仁官:생몰년 미상, 의병의 활동. 일명 조병생(趙丙生), 제주면 동광양(과양)에서 거주. 제주의 의병 활동은 1907년 해아밀사(海牙密使)의 책임을 일본은 고종황제에게 추궁해 강제로 퇴위하게 하고 한국 군대를 해산시킨 데 국민이 분노 표출, 국권회복을 외치는 데서 일어난 거사였다. 

주성(州城) 동광양 쪽에 살던 유생 고사훈(39, 의병장), 이석공(개명 중심(中心)), 김석윤(개명 석명(錫命)), 조인관(趙仁官), 노상옥(盧尙玉) 등이 거사를 의논했다. 
순사(巡査) 강원호(康源鎬)는 조인관을 체포하려 했다. 동 3월 3일 고승천과 김만석은 총살되고 의병참모 김석윤은 동광양에서 체포되고 이중심, 조인관, 노상옥 등은 귀덕(歸德) 포구에서 육지부로 탈출했다. 

또 1908년 제주경찰서장에 통감부(統監部)의 경부(警部) 시미츠(淸水重滿)가 부임, 대정, 정의, 서귀포 등지에 경찰관분파소(分派所)를 설치해 도민을 위협했다. 
1908년 12월에 사임하고 떠나는 윤원구(尹元求) 제주군수는 “일본이 통신과 재정을 장악하고 이 나라의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박탈했으니 어찌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이 섬을 떠났다. 

고사훈은 서당 숙장 김석익(金錫翼)과 고성모(高聖模)를 의병장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1909년 2월 25일 조인관의 집에서 고사훈, 이중심, 김석윤, 노상옥, 김재돌(金在乭), 양남석(梁南錫), 한영근(韓永根), 김만석(金萬石·25) 등이 모여 기병(起兵)을 결의하고 의병장에 고사훈과 이중심을 추대했다. 
결전(決戰) 거사일 동년 3월 3일 주성(州城)을 점령하기로 정해 격문과 통고문을 2월 25일 정오를 기해 사발통문(沙鉢通文)식으로 돌려, 병력을 동원하러 고사훈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고사훈, 조인관,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은 당일 영락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을 가담시키고 신평, 안성, 광청 등지에서 장정 300여 명을 가담시켰다. 이때 대정군수 김종하(金鍾河)는 관군과 장정 30여 명을 동원해 경찰과 공조하면서 의병 활동을 차단, 이에 출동해 무력에 의존한 경찰과 맞설 수 없었다. 
2월 28일 그만 고사훈과 김만석은 체포당하고 나머지 의병은 지휘부를 잃어 흩어지게 되었다.

▲조정철趙貞喆:1751(영조27)~1831(순조31), 학자이며 문신. 제주목사.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참판 영순(榮順)의 아들, 자는 성경(成卿) 혹은 태성(台城), 호는 정헌(靜軒) 또는 대릉(大陵). 

그는 1810년(순조10) 이현택(李顯宅)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12년 6월에 사직, 1775년(영조51) 정시문과(庭試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 신(新)목사는 구실을 만들어 “읍비(邑婢)를 간음하였다.”고 해 조정철은 힐문을 당하고 또 읍비 홍의랑(洪義娘)을 신문, 김시구 목사는 홍랑(洪娘)에게 참장 70을 내린 후 폐사, 때는 윤 5월 15일이었다. 
6월 2일 주성 남문 밖에 장(葬)을 지냈다. 조정철은 1811년(순조11) 제주목사로 부임, 홍의랑의 묘소를 찾아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지어 돌에 새김으로써 그녀의 원혼을 달랬다. 
1777년(정조1) 강용휘(姜龍輝) 등이 정조를 시해하려고 한 사건에 연루돼 죄가 참형에 해당했으나 조태채(趙泰采)의 증손이므로 감형되어 제주(濟州)에 유배된 뒤 정의(旌義)·광양(光陽)·토산(兎山) 등지로 이배됐다. 

전 정언 조정철은 1810년(순조10) 9월, 전라도 무장(茂長)현감으로 도임하고 1811년 5월에 제주방어사 즉 제주목사로 옮겨졌다. 1810년(순조10) 풀려나와 정언(正言)·동래부사(東萊府使)를 거쳐 1813년 충청도 관찰사가 됐다. 
1816년 이조 참의가 된 뒤 이조참판·대사성·형조참판·좌참찬·대사헌 등을 지내고 1831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됐다. 

저서로는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이 있다. 이 책은 조정철의 시집인데 4권 2책으로 된 활자본이다. 
1824년(순조24) 저자 자신이 간행했고 권두에 자서와 유한준(兪漢寯), 권상신(權常愼)이 쓴 서문이 있다. 책명을 ‘영해처감록’이라 한 것은 저자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하던 당시에 기록했다는 뜻이다. 

당시 제도상 유배생활 중에서 소리 내어 독서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저자는 무료한 나날을 독서 대신 시작(詩作)으로 보냈던 것이다. 이 책은 시 635수로 구성돼 있다. 
대개 정조시해 음모사건에 연루된 억울하고 울분한 심정, 유배지에서 명절을 맞이했을 때의 감회, 그리고 제주도 특유의 풍습, 경물, 기후, 인정 등을 읊은 것들이다. 

또한 고인들의 적중음(謫中吟)을 차운한 것이 많고 시제 중에는 자도(自悼)·견민(遣悶)·원회(寃懷)·비원(悲寃)·객한(客恨)·축한(逐恨)·비신세(悲身世)·적중유감(謫中有感) 등 주로 자신의 불우한 신세를 비탄하는 것들로 점철돼 있다. 
이러한 감정은 한라산을 읊은 ‘망한라산(望漢拏山)’ 33수와 제주도의 모든 풍경을 읊은 ‘탐라잡영(耽羅雜詠)’, 그밖에 ‘설월(雪月)’, ‘침상(枕上)’, ‘청두우(聽杜宇)’, ‘추흥(秋興)’ 등 어디에서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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