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첩을 정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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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익, 시인·수필가/ 문학평론가

오랜만에 단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엔 농부가 아니라도 딱히 할 일이 없다. 오래 전부터 하려고 했지만 못한 명함첩을 정리했다.

앞뒤 200면의 명함첩에서 불필요한 명함 80개 정도를 빼냈다. 명함 모으기가 취미는 아니지만, 입수한 명함을 함부로 버리지도 않는다. 묘한 것은 필요 없는 명함이라고 버린 것이 다시 꼭 쓸 데가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인명에 관련된 명함은 물론이고, 맛집 식당의 명함도 챙겨둔다. 사회생활의 모임에서 모임 연락을 취해야 할 때 명함첩만 고속으로 살피면 된다. 식당의 명함도 많은 걸로 봐서 친구들 하고 맛집 순례를 꽤 했다는 느낌이다.

명함도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명함은 소지자가 대단한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있는데, 앞뒷면에 영문까지 추가한 사람도 있다. 혼자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다.

돋보기를 써야 겨우 읽을 정도의 작은 글씨로 명함을 만든 사람도 있다. 그러려면 무엇 하러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명함은 남에게 주게 마련이므로 받는 사람의 불편한 사정도 고려해야 할 것이 아닌가.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겐 명함 한 장이 아쉬울 때가 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돈 주면서 명함을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사람이 있다. 직함을 내세울 것 없는 보통사람이라도,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힌 명함이라도 좋지 아니한가. 옛날엔 폼으로 파카 만년필을 윗주머니에 꼽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볼펜 한 자루를 갖고 다니는 사람도 드물다.

외우기 선수가 아닌 이상, 잊지 말아야 할 사람도 잊는다. 명함 한 장이면 깨끗이 해결될 일이 아닌가.

직함이 없는 내 명함도 제목은 ‘만나서 반갑습니다’이고, 이름과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다. 주소 등 특별한 변동사항이 없는 한 한 번에 100장을 인쇄하기 마련인 명함으로 2년 이상 사용한다.

수없이 많은 명함을 다 지니기도 그렇고,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다 해결하니 별 문제는 없지만, 명함은 이래저래 필요할 때가 많다.

명함은 그 사람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다. 몇 년을 구겨진 듯 오래된 명함을 주는 상대는 다시 한 번 쳐다본다.

오늘 명합첩을 정리하면서 내 명함을 드렸던 사람들에 대해서 좀 생각해 봤다. 누군가에게선 나처럼 방만하게 정리됐던 명함을 빼서 던져버렸을 것이다. 행여 내게 좋지 않았던 인상을 받았던 사람은 외출에서 돌아오는 대로 내 명함을 휴지통에 처넣었을 터이다. 좋은 인상이었으면 내 이름을 기억하고, 내가 쓰는 칼럼의 독자가 됐을지 누가 알아.

나도 도내 일간지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칼럼을 쓴 지 올해로 24년 차가 된다. 꿈은 이루어진다. 24년 전 수필가로 등단하면서 당시 모 지방신문의 부장 기자였던 친동생에게 부탁해서, 이후 17년간을 거기서 72편의 칼럼을 썼다.

목수는 20여 년이면 눈 감고도 대패질을 정확히 한다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칼럼을 쓰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대학시절 조선일보의 명칼럼니스트였던 모 부장판사의 칼럼을 감명 깊게 읽으면서, 후일 나도 칼럼니스트가 되리라 다짐했다.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는 모두 다르지만, 모자라는 능력을 십분 발휘할 생각이다.

아직은 노력한 만큼 얻은 성과가 별로다. 모자랄수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줄 안다.

하늘은 비 오는 날에도 늘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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