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아파트 뜰에서
4월, 아파트 뜰에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길웅 칼럼니스트

대엿새 비와 미세먼지 나쁨으로 갇혀 있었다. 코로나가 방구석을 지키는 데 내성을 키운 꼴이다. 마스크가 해제됐는데도 외려 써야 한다는 의식이 고개를 쳐드니 모를 일이다. 딴엔 쓰고 나서는 게 편하게끔 된 것이라, 이상한 증후군이다. 이런저런 구실을 달다 며칠 만에 4월의 아파트 뜰에 내렸다.

발을 놓는 순간,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 며칠 어간, 바깥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눈부시게 숲으로 덮어 하늘을 가렸던 벚꽃들이 가뭇없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감쪽같은 변화에 혀를 찬다. 꽃의 자리로 어느새 연둣빛 잎들이 돋아나 실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지 않은가.

눈이 이르는 곳마다 연둣빛 고운 이파리들. 벚나무, 백목련, 단풍나무, 팽나무, 때죽나무, 산수국…. 겨우내 기다림 뒤가 아닌가. 눈발 앞에 벌거벗었던 저것들, 초록으로 잽싸게 몸을 감쌌다. 볕이 좋아 나왔으려니. 숲에 숨어 살던 직박구리 한 쌍 포로롱 포로롱 날아들더니, 아직 낯설었나. 삽시에 푸른 숲속으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깜찍한 동박새 한 마리 수줍은 듯 목련 잎에 몸을 숨기더니 금세 자리를 뜬다. 보고 싶은 새는 오래 머물지 않는가. 그래도 녀석, 제 짝을 불러들일지도 모른다.

제주방언 낑깡을 모르는 이가 그렸을까. 어느 동화책 속 컷으로 본 듯한, 아파트 뜰에 아이들 놀잇감, 구슬만한 웬 작은 금귤인가. 이름 터수의 크기였으면 열매가 황금빛으로 반짝일 텐데 아쉽다. 그래도 한참 철 지난 4월에 귤을 떠올리게 풍경 하나 보태고 있잖은가. 제 몫을 하고 있으니 보기에 싫지 않다.

바닥에 나풀대는 낌새에 눈길이 간다. 그새 바람에 흔들리게 자란 바랭이. 언제 싹터 저만치 허우대를 키웠을까. 너울너울 여름으로 뻗을 만반의 채비를 끝낸 몸짓이다. 읍내 동산 집, 보료처럼 깔았던 잔디마당이 떠오른다. 잡풀 가운데 바랭이는 쉬이 물리쳤으나 제일 그악했던 게 괭이밥이었는데, 여기엔 눈에 띄지 않는다. 이곳 도시인들에겐 눈 밖인 쑥도 무성하게 한 자리를 틀고 있다. 민들레와 질경이도 없다. 도시 진출에 실패한 것 같아 대신 이름을 불러놓곤, 시골에 오래 살던 티를 낸다 싶어 실없이 웃는다.

동을 돌아가는 모롱이에 바자울처럼 벽을 싸고도는 관목이 시선을 붙든다. 초대면이다. 작은 꽃들이 피어 눈같이 덮였다. 식물을 좋아하고 뜰을 가꾸면서도 처음 보는 녀석이다. 그런 푼수에도 저런 꽃 시절 인연을 만나고 있으니, 이런 좋은 연이 있으랴 싶다. 오갈 때면 으레 하얀 꽃에 끌려 다른 길을 버리고 이곳을 돌며 눈을 맞출 것 같다. 싱그러운 매무새가 여름으로 이어질 것 같아 좋아라 하고 있다.

신록의 계절, 좋은 볕과 바람 속에 시나브로 뜰은 녹음으로 짙어 갈 것이다. 여름의 절정으로, 늦게 피는 꽃은 가을로 흐르며 열매로 한 해를 완성하리라. 기어이 그러하리라.

한나절, 4월의 아파트 뜰에 그냥 어정뜬 게 아니다. 나를 방목했다. 값진 시간이었다. 방목은 방임해 풀어놓는 게 아니다. 생명들과의 정겹고 촘촘한 교섭이고, 삶의 기쁨을 수수(授受)하는 소박한 의식이다.

갖가지 나무와 꽃들에 둘러싸인 풍성한 뜰이 있는 이곳, 살아가기에 미흡함이 없다. 30년을 내 손으로 가꾼 읍내 집 뜰을 떠나왔지만, 이만하면 됐다. 오늘 자신과 언약했다. 13층에서 하루 한 번 뜰에 내려오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