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4월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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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미 문화부장

강요배 작가는 지난 1일 열린 제30회 4·3미술제 국제 컨퍼런스에서 제주4·3을 작품에 그려 넣으며 살아온 세월에 대해 ‘괴로웠다’고 고백했다.

미술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피해와 아픔을 시각화시켜야 하는 문제에 부딪히며 상당한 고통이 따랐다는 것.

소설가 현기영의 원작 소설로 제작된 오페라 ‘순이삼촌’에서는 가사도 없이 토해내듯 뱉어내는 ‘아아~’, ‘어어~’의 모음만으로 무대가 채워졌고, 관객들은 아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순이삼촌이 옴팡밭에서 자신의 두 아이를 총탄에 잃고 아픔을 토해내는 장면이었다.

4월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음악, 미술, 문학 분야 할 것 없이 제주4·3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문화예술계의 노력은 처절했다. 예술인 스스로 실체적 진실과 아픔을 받아들여야만 작품으로 시각화하고 청각화할 수 있었기에 그들이 느꼈을 창작의 고통은 가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제주4·3을 듣고 자란 세대가 아니다. ‘속슴하며(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며 조용히)’ 살아온 집안 어른들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어느 누구도 제주4·3을 말하지 않았다. 당연히 학교에서 교육받은 적도 없다.

다만 중학생이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우리 할머니는 죽창에 찔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할머니 제삿날마다 우신다”는 말을 들었다. ‘죽창이 무엇이길래, 무슨 사고가 나서 돌아가신 걸까’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했고, 하숙집에서 학교로 가려면 지하철역을 건너다녀야 했다. 당시 입구마다 전투경찰이 서 있었는데, 주요 임무는 등교하는 학생들의 주민등록증을 검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민등록증을 보며 이름을 적었다. 누구나 다 적히는 이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소지가 제주로 된 주민등록증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들의 메모 대상이 됐다.

‘죽창의 진실’과 마주한 순간이었다.

제주4·3에 관한 신문기사에서부터 자료, 그리고 작품에 이르기까지 폭포처럼 쏟아지는 4·3의 진실을 접하며, 제주도라는 섬과 그 안에서 죽어간 사람들, 그리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존재로 살아온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됐다.

제75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지난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렸다.

올해는 추념식을 전후한 윤석열 대통령의 불참 이슈에 이어 ‘4·3추념일은 격 낮은 기념일’이라거나 ‘4·3은 김일성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는 집권 여당 최고위원의 잇따른 망언, 그리고 서북청년단의 등장으로 얼룩진 추념식이 됐다.

제주4·3은 실체적 진실이 드러났고, 국가폭력으로 인한 희생자에 대해 대통령의 사과가 있었으며, 희생자에 대한 보상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그러나 75주년을 맞은 제주4·3은 아직 제대로 된 이름이 없다. 그저 ‘제주4·3’일 뿐이다.

그동안 자신의 피를 쥐어짜고, 살을 베어내며 제주의 아픔을 표현하고 그려낸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은 제 몫을 다했다.

위정자들은 어떤가. ‘화해와 상생’을 먼저 꺼내든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제주4·3’의 진짜 이름은 무엇이냐고 말이다.

기억은, 그리고 슬픔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자 의무다. 그러나 위정자에게는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보다, ‘진실에 더 다가가 더는 어느 한 사람도 국가폭력으로 스러져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가 맞다. 제주4·3의 ‘정명(正名)’이 우선이다. 제대로 된 사과와 치유의 시작은 분명한 이름 앞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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