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뉘 같은 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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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오월은 신록 속으로 풍덩 빠져보기도 하고, 인연의 끈들을 또렷이 떠올려보기도 하는 달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가꿔 간다면, 그게 삶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전에 아내와 함께 마트를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혼자 사는 이웃 할머니와 마주쳤다. “둘이 함께 걸으니 참 보기 좋네요.” 인사말과 함께 근대나물을 뜯어 놓을 테니 갈 때 가져가라 하신다.

어림잡아 80대 중반을 넘고 있을 할머니, 우리가 이사 와서 얼굴 안 지 10년이 넘었지만 간단한 인사 외엔 속내 얘기를 나눈 적 없어 집안 사정은 알 수 없다. 어쩌다 따님으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눈에 띄지만, 전형적인 노년의 외로움과 손잡은 나날이다. 작은 텃밭에 채소를 심고 마당 군데군데 꽃을 가꾸며 소일한다. 나는 할머니의 표준어 말씨에 그녀에게도 한때 빛나는 별의 시간이 있었을 거라 상상해본다.

우리는 몇 가지 먹거리와 달걀 한 판씩 손에 들고 오다 나는 먼저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 집에 들른 아내는 극구 사양한다며 도로 달걀뿐만 아니라 근대나물 봉지와 아이리스 꽃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아내는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까 골몰하고 나는 그 보랏빛 화란붓꽃에 반해 마냥 신이 났다. 얼른 꽃삽을 들고 화단에 정성스레 심었다.

그러고 보니 올봄에도 꽃 식구가 셋 늘었다. 월마트에서 글라디올러스 구근을 사다 여기저기 심었는데 칼날 같은 파란 싹이 돋아난다. 동네 길가에서 꺾어온 능소화 줄기도 꺾꽂이했으니 몇 년 후면 담벼락이 환해질 테다. 이렇듯 내 삶의 원동력은 설렘으로 기다리는 것, 그걸 위해 소소한 것들이 내겐 대단한 것들이 된다.

며칠 전 교육사랑회가 정석비행장 근처에서 봄나들이 행사를 했다. 화창한 날씨가 회원들을 반겼다. 고사리 꺾는 팀과 오름 오르는 팀으로 나뉘었고, 나는 따라비오름 오르기를 택했다. 등산로의 해진 야자매트를 교체하려고 일꾼들이 새로운 두루마리를 운반기에 실어가 군데군데 내려놓고 있었다.

도중에 한 번 쉬고 자벌레처럼 몸뚱이로 세상을 재듯 걷고 걸어 정상에 도착했다. 사방을 휘 둘러본다. 가슴이 뻥 뚫리는 맛이라니. 우리를 환영하듯 사방의 오름들이 멀리서 눈길을 보내고, 생각이 스친다. 인간처럼 직선으로 내달리지 않고도 자연은 곡선처럼 아름답게 할 일 다 하는구나. 삶 자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살아가라고, 풀꽃도 보고 하늘도 바라보며 여유를 배우라고 일갈하는구나.

죽도록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들어요. 자연을 벗어나면 들리는 아우성을 어찌할 것인가. 보릿고개의 허기는 과거의 일일 뿐, 상대적 삶의 층위는 한이 없어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는 해결할 길이 없을 듯하다. 법정 스님의 말씀을 공유하고 싶다. “조금 모자란 것에 만족하는 삶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양달 응달 가리지 않고 봄볕 농익어 꽃향기 그윽한 오월, 모두가 힘내서 생명의 에너지가 폭죽처럼 터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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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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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8 20:45:30
멋진 글이네요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