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현 전패(殿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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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학,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논설위원

올해는 조선시대 제주도의 세 고을 중의 하나인 정의현(?義縣)이 이설된 지 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의현은 1416년 처음 설치될 때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를 읍치로 삼았으나 왜구들의 침입이 우려되고 동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어서 1423년 지금의 성읍민속마을로 옮겼다. 이후 읍성이 축조되고 관아와 민가들이 들어서면서 조선왕조 내내 읍치로서 기능했다.

현재 읍성 내부에는 다양한 문화재가 남아 있는데, 이 가운데 정의현 객사에 있었던 전패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패는 조선시대 전국 330여개 고을의 객사에 봉안되었던 국왕을 상징하는 위패로 ‘전(殿)’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을의 수령은 국왕의 위임을 받은 관료이기 때문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객사에 모시고 매월 초하루 보름날에 망궐례를 올렸다.

전패는 국왕의 상징물이므로 그 보관 및 관리가 매우 엄격하였다.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되어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10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에 병합되며 수령은 파면되었다. 이 때문에 수령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그를 축출하기 위하여 고의로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일도 있었다. 전패가 지니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일제는 식민지배를 위해 전패를 우선적으로 없앴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고을의 전패가 사라졌다.

현재 정의향교에 보관된 전패는 전국 고을의 객사 전패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패의 유래에 관해서는 『제주계록』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1847년 3월 15일 정의현 객사의 전패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3월 19일에 다시 찾아냈지만 전패가 이미 도둑의 손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에 이해 6월에 새로 만들어 봉안했고 기존의 것은 객사 후원에 묻었다고 한다. 새로 만든 전패가 지금 남아 있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한학자 오문복 선생의 고증이 있다.

오문복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일제가 객사를 없애고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땅에 묻으려 하자, 당시 정의향교 재장(齋長) 오방렬(吳邦列) 등은 통문을 돌려 유림들을 규합, 명령에 불복해 전패를 수호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일본 관헌들이 다시 강제로 객사를 허물려하자, 오방렬 등은 해당 전패를 정의향교 명륜당 뒤에 있던 오의사묘(吳義士廟, 의사 오흥태를 모신 사당)에 몰래 옮겨 모셨다고 한다. 이에 오방렬은 전패를 몰래 빼내 숨긴 사실이 발각돼 체포됐고, 1914년 결국 형독(刑毒)으로 숨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의사묘에 옮겨졌던 정의현 객사 전패는 이후 의사묘가 헐리게 되자, 정의향교 대성전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제작연대와 보존 이력이 확실한 객사의 전패는 정의현 전패가 유일하다. 현재 육지부 고을의 객사에 봉안된 전패는 대부분 복원품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논할 수는 없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정의현 전패가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여 2020년에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 고시했다. 앞으로 소중한 지역의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알리는 노력이 절실하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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