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의 한 소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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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TV 트로트 쇼 프로를 보며 저녁 식탁에 앉았다. 말없이 밥을 먹던 남편이 “그러고 보니 올해 우리도 결혼 오십 주년이네. 그동안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 미안해.” 고개를 숙인 채 뜬금없이 건네는 말에 수저를 들다 멍하니 남편을 바라봤다. 무심했던 나도 금혼식이라는 말에, 난데없이 이 사람이 왜 이러지 하는 의아심이 스쳤다.

최근 들어 부쩍 내 모습이 측은해 안쓰럽단다. 눈가에 짖게 드리운 세월의 흔적은 마주 보는 거울이었다. 오십 년이면 나이로 지천명이다. 우리가 하늘의 뜻이라는 부부의 인연을 잘 이어 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동안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을 챙겨 주고받은 일이 별로 없다. 신혼을 거쳐 삽 십 대까지는 남편에게 간간 선물을 받았던 이후, 나이 들고부터 한 끼 외식하는 게 전부다.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살자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것, 그 핑계가 덤덤해져 무신경한 사이가 된 건 아닌지. 서로 챙겨 주고받으며 사는 것도 부부로서의 예의가 아닐까 하는 뒤늦은 생각이 든다.

아웅다웅하면서 엇갈려 가지 않고, 세월을 요리하듯 산 날들이다. 때로는 눈 흘기다 돌아서면 눈 녹듯 사라지는 미움, 이제는 손을 잡아도 예전처럼 가슴이 떨리지 않는 사이가 됐다. 종일 말을 나누지 않아도 눈빛으로 마음을 읽는 동지 같은 친구로, 먼 길 함께 떠났으면 하는 복을 기원하며 산다.

우연히 촌로(村老)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나한테 시집와 고생만 시켜 미안하고 고마워. 사랑해.” 눈물 그렁그렁한 늘그막 남편의 애정 고백에 가슴이 뭉클했었다. 살가운 남자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처럼 살아왔다. 결혼 전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을 배우자로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속은 깊으나 표현이 없는 내 남편. 아무리 속정이 깊은 진국이라도 내가 들여다볼 수 없으니 그 속을 어찌 알 수 있었으랴.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 없으면 한시도 못 살 것 같다가도, 당신하고는 하루도 살기 싫다는 질긴 인연, 서로 어우르며 맞춰 살려면 부단한 인내력이 필요하다. 부부가 갈등하는 이유로는 상대를 내 뜻대로 끌어들여, 지배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 존중하는 관계로 산다면 큰 소리 날 일이 적을 것 같다.

유튜브로 노상 듣는 곡이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당신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사람인지. 세월이 흐르고 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 언제부턴가 글을 쓰거나 밥을 하며 흥얼거리는 나를 보게 됐다. 가사와 곡이 마음에 닿더니, 애절한 음색까지 더해 는개처럼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다. 별빛 같은 사람.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별빛이었을까. 대중가요 한 소절이 평범한 삶의 진실한 표현이자 철학일지 모른다.

결혼식 날 부케로 흰 카네이션을 들었었다. 가끔 남편에게 농담 같은 진심으로 꽃다발 한번 받아보았으면 바랐다. 금혼식 기념으로 분홍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선물로 받아, 오십 년 전 그날처럼 설렘 속으로 풍덩 빠져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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