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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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완,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겨울밤 남루한 행색을 한 구둣방 주인이 독한 술로 몸을 데우고 돌아오는 길이다. 교회 옆에서 벌거벗은 사내를 발견하고는 집으로 데려온다. 타박하던 아내도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고 있는 사내를 불쌍히 여겨 집으로 들인다. 미소와 함께 미하일이라는 이름을 알려준 사내는 구둣방 일을 금세 배운다. 첫 미소를 지은 그날 이후 사내는 두 번 더 미소 짓는다. 고급 가죽을 들고 와서는 1년이 지나도 해지지 않을 장화를 주문하는 부자, 그리고 쌍둥이 가운데 한쪽 다리가 불편한 아이의 신발을 따로 주문하는 부인을 보았을 때다.

톨스토이(Leo Tolstoy)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885)에서는 세 가지를 묻는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형편이 넉넉지 않은데도 군식구를 받아들인 구둣방 내외의 마음속에는 곤경에 처한 이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죽음의 천사가 곁에 있는데도 가죽장화가 걱정인 부자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생모가 죽었고 몸마저 불편한데도 쌍둥이는 ‘이웃의 사랑’으로 잘 살 수 있었다.

‘사랑’이라니! 진부하다 못해 고루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천사의 입을 빌린 신의 훈계는 늘 이런 식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다면 이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이 고루함에 넌덜머리가 난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즐거운 학문>(1882)에서 “미치광이”의 입을 빌려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유명한’ 사망선고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신은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위로할 것인가?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신이 사망선고를 받은 지 백 년도 더 지났다. 이제는 예능프로그램 제목처럼 “나 혼자 산다”가 익숙해졌다. “이러다 다 죽어!”라는 걱정을 누가 할까 싶다. 그렇다고 실망하기는 이르다. 문득 “당신 없이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어. 사랑밖에 난 몰라”를 흥얼거리거나, 그러면서 떠올려 그리워하는 때가 있어서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사랑이 “꽃향기만 남기고 갔단다”를 목메어 부르는 것으로 끝날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물었던 니체는 물론, 우리도 이미 답을 알고 있나 보다. 스스로 위로할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뿐이다.

지난 4월 농림축산식품부 ‘천원의 아침밥 지원 사업’ 추가모집에 도내 세 개 대학이 선정되었다. 그보다 앞선 3월 내부 게시판에 사업 참여 의견이 개진되었던 제주대학교도 참여한다. 6월 1일부터 학생생활관을 주무부서로 하여 11월 30일까지 101일 동안 정부 지원 1000원, 제주도 지원 2000원, 학생 부담 1000원으로 이루어진 “천원의 아침밥”이 매일 300인분씩 제공된다. 학생생활관 1식이 5000원이니, 대학에서도 1000원을 부담하는 셈이다. ‘사랑’은 진부할지라도, 그 덕분에 오병이어(五甁二漁)의 기적이 지금도 일어난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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