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특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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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숙 / 수필가

젊은 남자가 바구니그네를 타고 있다. 반쯤 누운 자세로 얼음이 든 커피를 빨대로 쭉쭉 빨아올린다. 햇살이 부신지 눈을 찡그리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한다. 봄이지만 아침은 꽤 쌀쌀하다. 그런데 반바지 차림에 찬 음료라니. 나는 점퍼에 머플러 까지 두르고 그 광경을 바라본다.

공원 놀이터에 설치된 바구니그네는 두세 명이 함께 탈 수 있어 인기가 많다. 오후가 되면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길다. 아기를 안은 엄마, 쌍둥이 형제, 학교를 마친 학생들도 함께 즐긴다.

“저 바구니 타고 하늘로 훨훨 함 날아보고 싶소. 그런데 몸이 말을 들을라나.”

“모냥만 빠지지 뭐, 귀경만 하소.”

며칠 전에 할머니 두 분이 의자에 앉아 몸을 놀이터 쪽으로 쑥 내민 자세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갔다.

젊은이는 통 내릴 기미가 없다. 아까부터 유치원생 꼬마와 엄마가 기다리고 있지만 모른 척이다. 칭얼대는 아이를 엄마는 연신 달랜다. 그때다. 높고 칼칼한 소리가 놀이터에 쩌렁쩌렁 울린다.

“이놈아, 어린아이가 눈에 안 보이냐!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어른이 아침부터 그네가 뭐냐!”

위엄 서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 지팡이를 쥔 노인이다. 남자가 바스스 일어나더니 꼬마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구석진 곳을 향해 슬리퍼를 끌며 간다. 어른이 아니라 앳된 얼굴의 청년이다. 일터를 잃었는지 아침 출근 시간에 헝클어진 머리와 얇은 옷에 찬 음료까지. 내 몸이 오스스 떨린다. 뒷모습이 가엽다 못해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그 책임이 오롯이 나처럼 나이든 세대 탓으로 느껴진다.

공원을 돌아 연못 쪽으로 가는데 아까 그 할아버지가 풀밭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다. 깔끔한 베이지색 맥 코트와 진회색 중절모가 잘 어울려 노신사의 풍모가 느껴진다. 슬쩍 다가서는데 “기특하다 기특하다”를 연발한다. 흰제비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다. 그저 지나칠 수 있는 장소다. 노란 민들레가 지천이고 보라색 금창초들이 어깨동무까지 하고 있어 흰제비꽃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작은 꽃이다.

제비꽃을 내려다보던 노인이 갑자기 그네 쪽을 돌아보며 “에잇, 그놈” 하면서 혀를 끌끌 찬다. 호통은 쳤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분명 그도 세상에 태어난 사실만으로 기특한 녀석이었다. 첫 걸음을 뗄 때, ‘엄마’를 소리 내어 처음 부른 날, 부모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줄 때, 자전거의 페달에 두 발을 올린 날, 입학과 졸업식, 첫 출근 등 기특한 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분명 흰제비꽃처럼 갸륵하게 땅을 박차고 오르는 용기도 배웠을 것이다.

많은 것을 포기한 N포 세대에겐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쉬지 않고 뛰어 보지만, 모든 상황이 불리하다.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헛돌기만 한다. 그 바람에 화가 끓어올라 아침부터 공원으로 나온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불 속에서 끙끙대지 않은 것이. 지하 게임방에서 시간을 죽이지 않은 것도. 어둡고 습한 골목이 아니라는 사실이. 동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햇빛 내리는 공원이니까. 흔들리는 바구니그네에 몸을 맡긴 채 허물을 벗고 성충이 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네를 타는 꼬마가 까르르까르르 웃어 댄다. 엄마도 함박웃음을 짓는다. 비파나무 아래에 서 청년이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본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네에서 내려온 남자를 노신사도 지긋이 바라본다. 틀림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기특한 놈’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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