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몽운동으로 여성 지위 향상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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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항일운동가 최정숙

최익현, 제주로 유배…한라산 기행문 지어 면암집 수록
최재영, 제22대 제주도지사…제13회 소년체전 개최
최정숙, 3·1 독립만세 등 항일 운동…초대 교육감 선출
최현식, 언론과 문학 활동 기여…제주도문화상 수상
초대 교육감이었던 최정숙은 1921년 3월 여성의 문맹퇴치 강습소 여수원이 개원한 가운데 여성 동지 강평국과 함께 문맹 여성 50명을 모집하고 교육을 전담했다. 사진은 1967년 5·16 민족상을 수상한 최정숙 선생(사진 가운데)의 모습.
초대 교육감이었던 최정숙은 1921년 3월 여성의 문맹퇴치 강습소 여수원이 개원한 가운데 여성 동지 강평국과 함께 문맹 여성 50명을 모집하고 교육을 전담했다. 사진은 1967년 5·16 민족상을 수상한 최정숙 선생(사진 가운데)의 모습.

▲최익현崔益鉉:1833(순조33)~1906(광무10), 문신, 한학자, 한말의 애국지사. 제주에 온 유배인. 최익현의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 대(垈)의 아들이다. 

9세 때 김기현(金琦鉉)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했고, 14세 때 벽계(蘗溪)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했다. 

그에게 1873년(고종10) 11월 10일 제주목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동년 12월 4일 조천포에 도착, 동 5일 제주성내로 들어와 윤기복(尹奇福) 일명 윤규환(尹奎煥) 댁을 유배소로 삼아 입소, 제주목사 이복희(李宓熙)가 이를 감시했다. 

이듬해 3월 27일 한라산에 등산해 두루 명승을 구경했다. 그는 귀양살이에서 풀리자 한라산을 등산하고 동 5월에 기행문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지었다. 면암집(勉庵集)에 실려 있는 이 글은 원래 한라산의 경치가 유명할 뿐만 아니라 작가의 묘사도 훌륭하여 좋은 작품으로 평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등재된 바도 있다.

최재영
최재영

▲최재영崔在榮:1928(일제강점기)~?, 행정가, 제22대 제주도지사. 원적은 충북 청원군이나 대전(大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 1961년 5·16 쿠테타 직후 병참대령으로 예편한 군수통이다. 

1980년 제3대 내무부 민방위본부장을 1년 4개월 동안 재임 중 1982년 제22대 제주도지사로 임명됐다. 

1978년 내무부 민방위국장를 거쳐 경기도 부지사를 역임하고 동년 1월 6일 부임한 최도백은 이 날 오후 3시 30분에 비행기에서 내려 도청에 들러 착임인사를 한 뒤 저녁식사도 거른 채 밤 9시까지 도정현황을 보고받았다. 이어 기자회견을 통해 “제주도는 태평양시대의 개막이라는 시대적 조류 속에 국제교역과 교통의 거점이 될 전망이 크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둬 제주도를 손색없는 국제관광지로 개발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동년 1월 15일에 ‘밝고 활기찬 새 제주’를 도정목표로 정하고 각종 개발계획에 대해 손질하기 시작했다. 

1983년 5월 20일 전국소년체전 참가 차 전주에 내려온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전북 도지사 관사에서 가진 만찬장에서 ‘제13회 소년체전의 제주 개최’를 지시했다. 
한라체육관은 착공한 지 3년 7개월 만에 문을 열었으며 모두 40억원을 투입해 6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최정숙
최정숙

▲최정숙崔貞淑(여):1902(광무6)~1977, 본관은 탐진(耽津), 초대 제주지법 법원장을 지낸 최원순(崔元淳)의 딸로 ‘제주-성안’ 삼도리(향청-골)에서 태어났다. 
교육행정가, 여성운동가. 의사. 교육감. 민족문화 창달 및 기미년 독립만세 당시 서울에서의 항일 활동에 참가했다. 1964년 제주도 교육위원 등 6인이 참여한 1차 투표는 과반수 미달로 2차 투표를 실시, 4표를 얻은 최여사가 초대 교육감에 선출됐다. 또 1967년 제2회 5·16 민족상 교육부문 본상을 수상, 이때 부상으로 받은 100만원으로 정화(貞和)장학회를 설립, 불우학생들에게 사용했다. 

초기 유치원 생활을 거치면서 천주교에 귀의, 1909년 4월 사립 신성여(晨星女)학교에 입학하고 1914년 3월 강평국(姜平國) 등과 함께 제1회로 졸업했다. 이듬해 서울의 진명(進明)여학교에 입학해 명동성당에서 숙소를 마련했다. 1918년 3월 사립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듬해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입학했는데 민족차별이 심한 것을 느껴 반일감정이 자연 움트게 됐다. 

1919년 졸업하고 1919년 3월 1일 79명에 이르는 비밀 조직 소년결사대(少年決死隊)를 이끌고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박희도(朴熙道)와 연계됐는데 당시 경성여고보 사범과 연락책은 유철경(兪喆卿)이었다. 

여학생들은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학생시위를 주도했다. 일경의 무력 탄압에 의해 체포됐다. 동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아 미결기간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여성 교육과 여성 계몽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해 1920년 제주 유지들이 제주여자장학회를 설립, 여학교의 개설을 서둘게 되자 1921년 3월 그 선행 사업으로 여성의 문맹퇴치 강습소 여수원(女修園)을 개원했다. 여성 동지 강평국과 함께 문맹(文盲) 여성 50명을 모집하고 그 교육을 둘이 함께 전담, 이 ‘여수원’이 사립 명신(明新)학교에 통합하면서 또 교직을 맡았다. 1944년(일제말) 어려운 시기에 삼도리 향청(鄕廳) 안에 소아과 정화의원(貞和醫院)을 개업해 불우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봉사하는 인술을 펼쳤다. 조국이 광복돼 고수선(高守善) 동지와 함께 대한부인회를 조직,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또 일제의 강권에 의해 닫혀 있던 신성여학교의 재건에 노력, 마침 수이니 신부의 도움으로 미 군정 당국에 요청, 야간부 1학급인 신성여학원(晨星女學園)을 개설하고 교사로 재임, 1949년 신성여자중학교로 인가받았다. 1954년에 사립 신성여자고등학교를 새로 개설해 초대 교장이 돼 무보수로 재임하면서 명문 여고로서의 기반을 구축했다. 정부에서는 1993년 3·1절에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追敍)했다. 

최현식
최현식

▲최현식崔玄植:1924(일제강점기)~2010, 언론인, 소설가, 호는 현초(玄礁), 본관은 전주, 함경남도 흥원에서 태어나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했다. 6·25 당시 월남해 애월리에 정착, 애월포 마을의 장부자(張富子)와 결혼해 1남 5녀를 두고서 국학대학 수료, 195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노루’로 문단에 데뷔했다. 
귀향 이후 제주신문 편집국장, 한국예총 제주도지부장,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회장을 역임, 줄곧 제주사람으로서 언론과 문학 활동에 기여했다.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창작집 ‘홍상(紅裳)’,  ‘먼 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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