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나무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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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 / 수필가

가을비, 봄바람이란 말이 있다. 가을에는 비가 많고, 봄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 계절의 특징을 일컫는 말이다. 겨울의 삼한사온도 없어지고, 봄이 왔는가 싶으면 여름이 들이닥치는 이상기후의 시대에도 ‘봄에는 바람’이라는 말은 틀림없는가 싶다. 어제는 하루, 낮 밤을 센바람으로 채웠다. 오월의 날씨라고는 믿기지 않을 장대비를 동반한 바람에 울안의 대나무는 비명을 어둠에 매달며 몸을 떨어야 했고, 새끼손가락 끝마디 크기의 앙증스럽던 매실은 일찌감치 삶을 마감했다. 봄바람은 더 크고 튼실한 열매를 위해 솎아주는 자연의 적과 작업이며 하늘의 섭리이겠지만, 떨어져 버린 매실 열매들의 어린 생명이 너무 가벼워 보여 안쓰럽고 짠하다. 저렇게 일찍 마치려고 꽃에서 열매의 눈을 찾아내고 양분을 빨아대며 지금까지 애써 매달려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우리 집 마당에는 제법 튼실한 매실나무가 한그루 있다. 유실수라기보다는 정원수로 생각하며 심었는데 이른 봄마다 매화를 피워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을 녹여주는 기쁨에 더해 매년 한 광주리가 넘는 매실 수확의 보람을 준다. 아내는 그 매실을 잘 씻어서 해마다 매실청을 담근다. 농약을 전혀 하지 않은 귀한 것이라 여기고, 손자가 먹는 음식을 만든다든지 할 때만 아껴서 사용하고 있다. 십여 년 전, 매실나무를 심어주었던 그가 생각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어떠한 만남도 인연에서 비롯된다. 매실나무가 이어준 그와 만남도 인연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만들고 지워진 인연 속에는 삶의 획을 긋는 분명하고 질긴 인연보다 그저 스치듯 지나친 입김 같은 인연, 좋고 나쁨을 떠나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인연이 훨씬 더 많다. 평소에는 잊힌 듯 생각 없이 지내다가 어떤 꼬투리가 있으면 그리움처럼 피어나는 인연도 있다. 매실나무를 보며 무언가 생각하다 보면 내 기억의 문을 열고 부끄러운 듯 고개 내미는 그와의 인연처럼.

그는 조경업자였다.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앉힐 때 “나무에도 얼굴이 있고, 등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리저리 돌려가며 앞뒤를 맞추었다. 미술품 감상하듯 조금 떨어져서 주변과 어울리는지도 살폈다. 몇 번을 그렇게 살피고, 돌려놓으며 제자리를 찾는 숙고의 과정을 거쳤다. 나무 심기가 끝난 다음엔 물이 곁으로 새지 않게 촘촘히 다진 물집을 둥글게 만들고, 물집 가장자리, 흙을 메운 부분에 땅속 깊이 호스를 박아 관수했다. 그래야 공기층 없어지고 흙이 골고루 메워져 활착이 잘되기 때문이란다. 그뿐 아니다. 지주목까지 세우고 일을 깔끔하게 메조지 했다.

업자들은 대부분 시간이 돈이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할수록 생산성이 높아지고 주머니가 빵빵해진다. 돈만 생각하다 보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작업을 대충 대충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가 이 나무 한 그루에 시간을 물 쓰듯 했던 이유가 단지 나무에 대한 애착과 진정성 때문만이었을까? 어떤 만남이라도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심성을 읽어내지 못했다. 소중함을 소중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내 편견이 동아줄처럼 질기게 이어졌을 수도 있는 인연을 스치듯 지나치는 인연, 입김처럼 금세 사라지는 인연으로 만들어버렸다.

“수형이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 왔다”는 그의 말이 으레 업자들이 늘어놓는 자랑이나 생색내기가 아니었음을 아둔한 나는 이제야 깨닫고 또 깨닫는다. 미안했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싶다. ‘이름이나 연락처라도 받아둘 것을…’

“매실을 수확하는 날, 내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던 그의 말이 후회처럼 가슴에 치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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